영화 <이퀄스>
[이퀄스]의 배경은 감정이 통제된 사회이다. '인류 대전쟁'이라는 멸망에 가까운 전쟁 이후 인류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선진국'은 합리적인 방법을 택했다. '선진국'은 인간의 감정을 '위험 질병'으로 분류하고 감정이 '생겨난' 사람들을 '보균자'로 분류하여 통제한다. 철저한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이다. 무심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똑같은 종류의 옷을 입고 똑같은 방식으로 길을 다닌다. 사람들의 유전자에서 감정을 유발하는 요소를 제거했다는 방송이 지속적으로 흐른다.
사일러스가 잠에서 깨어 출근을 하고 일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가능했다. 그만큼 '흰색 사회'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행동, 웅성거림까지도 꾀나 세세하게 조절되었다.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는 '선진국'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드러낸다. 사일러스 한 사람의 하루를 따라감으로써 통제된 사회 전체를 조명한다. 꾀나 거리감을 가진 채로 사일러스를 지켜보는데 이 거리감은 사일러스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연출로 보인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사일러스의 삶은 그대로 사회를 드러낸다. '흰색 사회'에서 일부는 전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흰색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일러스와 니아의 모습을 보면서 아담과 이브가 떠올랐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 말이다. '흰색 사회'의 모습이 에덴 동산과 비슷해서였을까. 먹을 것이 풍요롭게 제공되고 의무적으로 일해야하는 사일러스의 모습은 신의 명령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아담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리고 감정은 선악과처럼 '태어난'다. 나무가 열매를 맺듯 서서히, 하지만 막을 수 없이 커져 과실을 맺는다. 영화는 사람이 감정의 깊은 곳까지가 닿는 과정을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일러스와 니아라는 표현 방식으로.
영화는 전체적으로 잘 기억에 남진 않는다. 감정이 없는 상태, 그런 사회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든 조건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딘가 존재할 것 같은 느낌도 잠시 들었지만 잡아두지 못한 채 상황이 바뀌어간다. 사일러스가 감정 보균자가 되면서 연출의 방식이 큰 변화를 맞이 하는 것으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거리를 두고 사일러스를 관찰하던 카메라는 사일러스의 감정에 따라 급격히 가까이 가게 된다. 불행히도 이런 움직임은 갑작스러운 느낌을 많이 유발하고 상황에 대한 몰입을 깬다.
사일러스는 1차 보균자로 판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 통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점점 '선진국'에 대한, 설정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한다. 또한 '관리국'에서 일하는 베스의 존재는 '흰색 사회'의 통제력을 관객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 사회적 통제는 합리적이지 않고 방만하다. 오히려 사일러스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통제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들은 자살한 사람의 사체를 보고 "대리석과 어울리지 않아."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사체를 등뒤에 두고 일에 집중한다. 삶의 욕구도 불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무심한 모습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통제가 그렇게 방만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무너진 설득을 뒤로하고서 영화는 자신의 색을 칠해나간다. 사일러스와 니아의 감정을 클로즈업하며. 두 사람이 파란 조명 아래 함께 있으면서 점점 서로의 감정을 알아가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다. 짙푸른 불안이 가득한 좁은 화장실 안에서 실루엣을 어루만지는 서로의 손길에 닿는 장면들. 서로를 만지고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나누는 교감. 흰색으로 가득찼던 앞의 장면들과 다른 여러가지 색들을 표현해낸다. 두 사람이 점점 감정적으로 가까워지고 깊어질수록 색의 명암은 풍부해진다. 물감을 하나씩 새로풀듯 새로운 색들, 붉은색(사일러스 그림의), 살색, 녹색 등을 등장시킨다. 색채가 짙어질수록 감정 또한 짙어진다.
'흰색 사회'를 통제하던 흰색에서 벗어나 두 사람의 삶에 색채를 녹여내면서 감정이 삶 속으로 들어옴을 표현한다. 이에 흰색은 흥미로운 역할의 반전을 맞는다. 흰색은 세계관을 관장하던 색이었다. 그러나 다른 색의 등장에 따라 색을 진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해낸다. 주요 색상에서 보색으로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 햇빛의 역할 또한 반전된다. 감정 보균자는 햇빛에 약한 특성을 보인다. 흰색을 가장 잘 드러내는 햇빛의 의미는 통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찬란한 이성의 통제, 명명백백을 대변하는 것.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신의 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맞잡은 두 손위로 내려앉는 햇빛은 두 사람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게 이미지를 감싼다.
이런 역할의 전개는 감정이 이성에 도움을 받음을 은유하는듯 하다. 비록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더라도 둘은 원론적으로 상생한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담은 것은 아닐까. '치료제'를 맞은 사일러스는 마지막에 니아의 손을 잡는다. "사랑을 했던 기억이 나지만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라고 말한 그가 왜 니아의 손을 잡은 것일까. 감정이 '제거'된 그에게도 사랑은 남아있다. 어쩌면 사랑은 감정의 극단이 아닌 너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사라질 수 없는 인간의 근간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희망으로 가득찬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숨막히게 진한 감동을 주지도, 유쾌한 낙관을 펼치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이퀄스]는 시종일관 빼는 것을 시도한다. 흰색, 간소한 식사, 많이 들어가지 않는 색. 마치 실험을 하듯이 깨끗한 공간을 만들려고 하는듯 했다. 그런 흰색 배경 안에서 사일러스와 니아의 교감의 순간을 카메라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여준다. 마치 세포가 엉키는 것을 관찰하는 실험자처럼. 그래서 [이퀄스는]숨막히게 엄청난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숨죽이고 보면 두근거림을 들을 수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