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장애 기록(8)
- 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두 번째 상담에서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노력에 대해 말하던 차에 나온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노력하면 다들 기특해하고 멋있다고 하지 아무도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나조차도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는 거예요.
- 쉬긴 해요? 침대에서 멍 때려본 적 있어요?
-.. 어, 없어요.
부지런하고 성실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는 엄마 아빠가 앉아서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을 견디지 못했다.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이거 했어? 저거 해야 하지 않아? 라며 날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자란 나의 시간은 당연히 금이 되었다.
라디오를 들어 경제 감각을 가져야 했고, 건강한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운동을 해야 했으며, 원만한 교우 관계와 사회생활을 위해 사람들이랑 술자리도 가져야 했고, 인문교양을 쌓기 위해 책도 읽어야 했고, 다양한 문화와 새로운 경험을 위해 해외여행도 가야 했고, 교수님이 내 준 숙제와 팀플을 해야 했으며, 용돈벌이로 알바를 해야 했고, 다양한 인맥과 진취적 경험을 위해 학생회도 해야 했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게 패션을 배우고 쇼핑도 해야 했다.
다 “해야만 “ 했다.
세상엔 뛰어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았고 해야 할 것들은 끊임이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게으름이었고 도태였다.
아무도 쉬어봤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26년 만에 쉬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은 내가 피곤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했다. 모니터링 일지에 이렇게 사방팔방 매일 아프다고 적어놓고 병원에는 왜 안 가냐고 했다.
엄마는 내가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간다고 왜 이렇게 자주 가냐고 해서 내가 엄살쟁이인 줄 알았다. 근데 몸이 남들보다 예민한 거라고 남들 병원 가는 빈도랑 비교하지 말고 아프다고 생각이 들면 병원에 가라고 했다. 아픈 게 진짜구나. 병원에 가도 되는구나.
아픈 건 알긴 하니까 개선이 쉬웠다.
문제는 컨디션 체크였다.
힘든 것, 지치는 것, 피곤한 것, 그게 뭐지
살면서 한 번도 내 컨디션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조금만 더를 외치며 노력하다가 꼭 컨디션 때문에 목표 도달 직전에 꺾여버린 경험이 많았다. 세상이 나의 성취를 막나, 원망도 해보고 이번에 그저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라고, 위로도 해봤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배웠으니까.
몸은 제발 쉬라는 신호를 보내다가 반응이 없으니 다른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
과자 먹고 싶어.
초콜릿 당겨.
단거 먹고 싶다.
“먹고 싶다”로 들리는 몸의 신호에서 신체가 실제로 원하는 바를 알아내는 게 모니터링 일지를 작성하는 이유였다. 내가 치료에서 유일하게 노력해야 할 일이었다. 26년간 무시했던 몸의 신호를 이제는 들여다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