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눈물
지난해 봄, 그러니까 코로나 팬데믹으로 중국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이어서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폭락하던 2020년 3월의 어느 날 일이다. 어머니와 저녁식사를 위해 식탁에 마주 보며 앉아 식사를 시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급락하고 있던 주식시장에 대한 내용이었고, 나는 10년 만에 오는 기회라 생각하여 대출을 일으켜 막 투자를 했던 터였다.
"아들아 코스피 지수가 많이 떨어졌더구나, 코로나가 정말 무섭구나"
"네 엄마, 폭락세가 무섭긴 한데 어찌 보면 10년 만에 한 번씩 오는 주식매수 기회인 거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도 좀 들어갔어요"
"에고... 그러냐 아들아, 빚을 내서 하지는 말거라"
어머니는 경제에 관심이 많으시고, 팟캐스트나 유튜브로 경제방송을 보시는 등 경제 현안에 밝으신 편이다. 상경계 대학 전공이자 금융권 기업 경력의 아들에게 먼저 경제 팟캐스트를 들어보라 권하시기도 하셨다. (지금은 100만 유튜버로 성장한 삼프로TV의 초창기 팟캐스트 신과함께였다.
"제가 빚을 내건 말건 제 선택이에요. 왜 우리 가족은 항상 보수적인가요? 그러니까 돈을 못 벌죠!"
"그렇게 주식투자를 잘 아시면 옛날에 아버지 주식 투자하실 때 좀 말리시지 그러셨어요. 그렇게 경제가 고성장하던 시기엔 주식투자로 돈 잃는 게 더 어려웠을 텐데.."
빚을 내지는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간 화가 치밀어 난 어머니께 대꾸했다. 레버리지 투자의 위험성을 상기시키는 걱정의 말이 아닌, 마치 공무원이나 교사가 최고의 직장이라 생각하는 모험을 싫어하고 안정적인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우리 세대 부모님들의 가치관이 투영된 말로 들렸다.
2011년 어느 날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강연의 이름은 '청춘콘서트'였다. 당시 직장인이었던 나는 여자 친구와 같이 가려고 티켓을 두장 구했다. 기대되는 강연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이별 후에도 너무나 듣고 싶던 강연이어서 결국 혼자서 강연장에 가게 되었다. 평화의 전당이라는 강연장이었는데 학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힘들게 오르막을 올라가다 주위를 둘러보니 죄다 대학생들이었다.
'청춘콘서트인데 내가 여길 가도 되는 건가?'
드디어 강연이 시작되고, 안철수 교수(그 당시 카이스트 석좌교수)의 세션이 있었다. 안 교수는 말하길
"오늘 여기 오시면서 내가 청춘인가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았을 거 같아요".
"여러분은 청춘인가요?"
마치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나는 공감하며 경청했다. 이윽고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고민을 하시면서 오셨을 거 같아서 제가 해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청춘인지 아닌지는 내가 지금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인지, 과거를 보고 있는 사람인지 보면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해보고 싶은 무언가가 있고, 그걸로 인해 미래를 바라보며 꿈을 꾸고 있다면 여러분은 청춘입니다!"
"여러분이 꿈꾸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꼭 그것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경험을 갖더라도 그것 또한 여러분을 만들 것입니다"
맞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무수한 삶의 기로에서의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평가하든, 나쁜 선택이었다고 자책하던 그 선택들로 인해 생긴 경험들의 총합인 것이다. 성공의 경험만 있었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위인들조차 무수히 많은 실패의 경험이 있었고, 그것들이 그들을 강인하게 만들어 왔으며,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어린아이답지 않게 포기하게 되는 것이 많았던 나의 어린 시절에 어른들은 날 보고 철이 일찍 들었다고 했다. 나의 누이에게도 그런 평가가 내려졌다.
나는 어려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우리 집엔 책도 별로 없었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동네의 다른 어머니께 부탁하여 위인전 3권을 빌려다 주셨다. 책을 빌려온 집은 나와 동갑인 친구가 살고 있었고, 종종 겜보이(조이스틱으로 팩 꽂아 플레이하던 콘솔게임류)를 하러 놀러 가던 좀 넉넉한 집이었다. 어느 날 동네에서 그 친구의 형을 마주쳤는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얀마 뉘 집에는 책도 없냐? 위인전 빌려간 거 왜 안 가꼬와?"
30~40권이나 되는 위인전 중에 3권이 없는데 마침 그 책이 읽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닐 테고, 책을 빌려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선 놀리고 싶어 그런 것 같았다. 난 그 길로 바로 집에 와서 책을 꺼내 들고 당장 친구네 집에 가서 돌려줬다.
사실 그 책이 어머니 손을 거쳐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있었으나 나는 보지도 않았다. 책에 흥미도 없어서보단 어머니께서 빌려왔다고 말씀하시는데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책은 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누나 입장에선 고마운 책이었고, 누구네 집에서 빌려온 책인지 알 길도 없으니 책을 읽어 나갔고, 나중에 그 책이 어디 갔는지 묻기에 내가 돌려줬다고 이야기했다. 다 읽지도 않았는데 왜 돌려줬냐는 말에 뭐라고 답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어린 나에겐 상처로 남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어느 날엔 우유급식비가 부족하자 그 친구 어머니께 사정을 이야기하시고는 돈을 빌려오셨고, 그 돈으로 급식비를 내라고 하셨다. 이런 어린 시절을 겪으며 철이 들지 않을 아이는 없다.
어머니는 늘 가족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오셨고, 난 IMF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가정주부이셨던 어머니는 나와 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곧 일자리를 알아보셨다.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시고, 어느 중소기업의 구내식당에서 곧 일을 시작하셨다. 늦은 나이에 자격시험 공부에 고생하셨을 텐데도 조리사 시험에 한 번에 합격하시고선, 시험장에 어린 여대생들만 왔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의 여파는 컸다. 보증을 섰다가 채무자가 연락 두절되자 그 빛은 고스란히 우리 집의 채무가 되었다. 결국 가정의 불화가 찾아왔고,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졌다. 술에 취해 귀가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시다 아버지가 물건을 집어던지시기도, 어항이 깨뜨려 집안이 난장판이 되기도, 면도칼을 집어 들기도, 한겨울에 길바닥에 누워 집에 들어가지 않으시겠다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빚은 다른 가족들에겐 짐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전단지를 돌리는 경험(그 당시 오락실에 있는 애들에게 일감을 주던 때가 있었다)을, 누나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여러 아르바이트를 거쳐 보습학원의 강사가 되어야 했다.
우리 가족에게 안전마진이란 것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안전마진이란 무엇인가? 어떤 도전을 쉽게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무형의 발판 같은 존재일까? 달리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바지에 흙을 털어내고 다시 달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달리면 빨리 갈 수 있지만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 느리더라도 다치지 않으려면 걸어 다녀야만 하는 게 우리 가족이었다. 이런 어린 시절을 겪자 나의 꿈은 안정적인 샐러리맨이 되었다. 사업가란 가족에게 너무 큰 슬픔을 주는 존재였고, 나는 절대 그런 것을 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컴퓨터 공학도의 탄생]이라는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고등학교 시절 유머사이트를 만들었고, 웹마스터가 되고자 다짐했기에 컴퓨터 공학과에 진학했는데...
막상 취업을 하고 나니, 컴퓨터공학도로서 부끄러운 회사원이 되어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컴공과를 갔나?'
그 시절 스티브잡스는 아이폰과 앱스토어를 출시하고, 드디어 아이디어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 놓았다. 카카오를 창업한 과거의 김범수 의장이 그러했듯, 꿈과 열정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에겐 흥분되는 창업 생태계가 탄생되었다. 그즈음 페이스북의 창업스토리를 영화화한 '소셜 네트워크'가 개봉되어 보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주커버그와 초기 창업가들이 기숙사 방에 모여 창문에 알고리즘을 적어가며 열정을 불태우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었다.
나 또한 꿈이 있었고, 그렇기에 컴퓨터 공학과에 진학했는데.. 영혼 없는 삶에 무기력한 시절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남은 20대 동안 나 또한 열정을 불태워 보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갖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20대의 끝자락, 사회생활의 시작.. 이제 막 안정된 나의 삶인데 꿈을 향해 모든 걸 내려놓아도 되는 걸까?
당신은 삶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어떤 선택들을 해왔는가? 당신이 그 선택을 고민할 때 타인의 삶을 고려한 적이 있는가?
20대가 된 나에게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안전마진을 없어지게 만든 장본인, 어머니와 누나는 안전마진을 다시 만들고 있는 일꾼이었다. 난 원하던 컴퓨터 공학도가 되었지만, 군대를 갓 다녀온 내 눈엔 가족은 한편으로 이렇게 보였다.
그즈음 누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세무공무원이 되었다. 대단한 사람.. 학창 시절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매번 고용주에게 인정받아 그만둔다고 할 때마다 급여를 올려준다며 하던 일마다 인정받았던 누나였는데, 어느새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해서 또 국가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뿌듯하고 존경스러웠다.
대학교 2학년 복학생이었던 나는 진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고민의 시간을 지내고 있던 중, 누나의 권유로 2학기부터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학기를 마친뒤에는 노량진의 고시원에 들어갔다. 4년제 대학의 2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공무원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 가족에겐 안전마진이 없었기에 납득할만한 선택이었고, 어쩌면 강요받은 선택이었다. 어머니와 누나가 얼마나 힘겹게 아버지의 부채탕감을 위해 힘써온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선택지였고, 꽤 정답에 가까워 보였다.
대한민국의 취준생의 상당수가 공시생이 되어 약 100:1의 경쟁을 뚫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고단함과 절실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공감한다. 사회적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이런 현상이 심해진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안전마진이 없는 나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젊은이들이라면 그들 또한 최선의 선택지 중 한 가지였으리라.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만 알게 되어도 성공한 대학생활이 아닐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기간 동안 "교양, 전공수업, 다양한 교내외 활동, 연애, 군생활, (유학), 인턴, 아르바이트, 선후배들과의 다양한 술자리(?) 그리고 친구들"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것에 흥미가 있고, 뭘 더 해보고 싶은지, 그리고 더 나아가 본인만의 가치관과 직업관이 생긴다면 성공한 대학생활이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 이런 가치관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2년 즈음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날 어머니와 저녁식사를 시작하며 나눈 대화의 끝은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날이 선 나의 말이 몇 번은 받아줄 만했지만, 끝내 어머니를 서럽게 만들었고, 어머니는 숟가락을 한 번도 뜨지 못하시고 울음만 보이셨다. 그 눈물에는 여러 의미가 담겼을 것이다. 자식에게 해주고 싶은 거 해줄 수 없었던 지난날의 부모로서의 참회와 못난 남편을 향한 원망, 가족을 위한 헌신의 시간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자신의 고된 시절의 아픔까지 담겨 흘렀으리라.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아들을 보이스카웃에 가입시키고 싶어 하셨다. 정작 난 그게 뭔지 잘 몰랐지만, 조그만 초등학생들이 단복을 입고 지나다니는 모습이 맘에 드셨고, 아들에게도 입혀주고 기회를 주고 싶으셨던 거 같다. 보이스카웃 활동이 있던 날이면 아침 일찍 군청색 단복에 배지도 몇 개 달고, 손수건으로 목에 카라를 하고 모자까지 쓰면 제법 잘 어울려 어머니께서는 흐뭇해하셨다. 하지만 정작 방학이나 주말에 열리는 프로그램엔 참여할 수 없었다. 대게 근교나 제주도에 가는 프로그램이 었는데 경비가 부담스러우셨을 것이다. 물론 투덜대거나 보내달라고 졸라대던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단복을 입고 등교해서 단원들끼리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라도 하면 그걸로 만족했고,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철수는 어려서 학교도서관에 있는 책을 매일 서너 권씩 읽었다고 한다. 매일 서너 권의 책을 빌려가는 안철수를 보며, 도서관 사서는 자기에게 장난치는 줄 알고 대출을 거부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날 도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안철수의 어린 시절은 안전마진이 있었을까?
어려웠던 가정형편 탓에 많은 것을 포기하며 자랐던 나의 10대, 그렇기에 안정적인 선택을 최우선으로, 강요받은 선택을 하였던 20대의 나의 삶, 그리고 이제 살만하다고 생각한 30대가 되어서야 창업가의 꿈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나였다. 내가 선택해온 나의 삶은 강요된 선택이었을까? 나의 선택이었을까? 다른 선택을 했었었더라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까? 약 일 년 즈음 지난 지금 그 상황을 되돌아보며 이 글을 어머니께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