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 문명의 궁극적인 목적

by 박종성
학교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 '쓸모'를 세뇌당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쓸모의 척도는 물론 화폐다. 내 앎이, 내 삶이 교환가치가 있는가? 잉여가치를 낳는가? 제도교육은 남보다 교환가치가 있는 인간, 곧 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육이다.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우리는 문학을 통해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맞춰지면서 본성은 찌그러지고 감각은 조야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상태로 일상이 굴러간다.

그런데 쓸모없다고 취급받는 문학을 통과하며 우리는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을 자각한다.

_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찰리 채플린이 출연한 영화 <모던 타임즈>를 기억하시나요. 대량생산 체제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20세기 초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죠. 찰리 채플린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장치의 일부가 되어 같은 일을 무수히 반복합니다. 거대한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은 ‘건강한 신체’, 딱 한 가지였죠. 생각과 감정은 불필요했어요. 눈 앞에 주어진 일을 제때 완수하면 그것으로 족할 뿐,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동료의 감정을 헤아리는 일은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인간다움이 말살된 거예요.


분업화와 합리화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병폐는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죠. 그런데 최근에는 ‘리버스 싱귤래러티(Reverse Singularity)’라는 새로운 현상과 맞물리면서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싱귤래러티(특이점)란 기계가 점점 똑똑해져서 결국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현상이잖아요. 리버스 싱귤래러티는 이것과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첨단 기술이 선사하는 편리함 때문에 인간이 점차 기계처럼 단순해져가는 거예요. 복잡하고 미묘하며 장황한 것에 질색하는 거죠. 요즘에는 검색 몇 번만으로 새로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문장이 길다든지 내용이 어려우면 금세 포기하고 다른 자료를 찾아나섭니다. 게다가 하이퍼링크를 타고 이곳 저곳을 쉽게 넘나들 수 있으니 한 가지 자료를 긴 호흡으로 들여다보려 하지도 않죠.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말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인내심의 한계를 금방 드러내고, 직설화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묻죠. 심지어 가족과 친한 사람들에게조차도 (마음속으로나마) ‘결론부터 간단히’를 요구해요.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차분히 음미해야 할 한 편의 ‘시(詩)’로 여기지 않고,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 할 일거리로 받아들입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인간다움을 바로 세우는 주춧돌은 ‘비효율’과 ‘목적 없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넉넉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복잡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더라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끝까지 경청하는 사람은 좋은 향기를 내뿜죠.


합리성과 단순성이 물질적으로 윤택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도구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물질 문명을 구축하려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뒀으면 합니다.


인간다움이 상실된 곳에서 피어난 물질적 풍요로움은 꽃이 아니라 독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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