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다양한 나의 첫 학생들
예상대로 되면 재미없지
드디어 오지 않을 것 같던 수업 첫날이 다가왔다. 수업은 저녁 6시부터 9시까지였다. 직장이 있는 Lower East Side에서 수업이 있는 학교까지는 지하철로 30-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첫 수업이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5시가 되기도 전에 퇴근해 학교로 향했다. 미리 수업할 교실에 가보질 못해서 과연 수업에 필요한 세팅이 다 되어있는지 걱정이 몰려왔다. 정규 수업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도움을 줄 IT 직원은 있는 건지, 있다면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이제와 걱정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저런 걱정과 함께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에 봐도 너무 근사한 학교 입구의 오래된 목재문을 열고 들어가니,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실내가 매우 조용했다. 적당하게 은은히 켜진 노란빛이 나는 조명들과 따듯한 공기가 나를 반기는 학교 안의 모습은 마치 어린 시절 봤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1월의 한참 추운 칼바람과 긴장된 마음에 한껏 경직되었던 몸이 조금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두툼한 목도리를 풀며 조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인상 좋은 할아버지 경비원 한분이 나를 반겨준다. 서류에 이름과 시간을 사인하고 혹시 수업하는 교실에 문제가 생기면 누구를 불러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자신이 계속 여기 있을 테니 전화하면 IT팀에 도움을 요청해 준다고 했다.
나는 다행히도 계획대로 수업 40분 전에 도착했고, 예정대로라면 교실에 있는 프로젝트와 수업용 컴퓨터 등을 꼼꼼히 확인할 계획이었다. 강의실 이름을 확인하고 들어서는 순간, 왜 벌써 2명이나 자리에 앉아있는 걸까? 시작도 하기 전에 어긋난 계획에,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Hello everyone!
미국에서 생존하려면 필수인 Small talk(가볍게 나눌 수 있는 짧은 잡담)를 할 시간이다. 슈퍼에서도, 돈을 뽑으러 기다리는 은행줄에서도, 직장에서도, 미국사람들은 스몰토크를 너무 사랑한다. 물론 아주 거지 같은 하루를 했다는 표정을 짓거나 영어를 못하는 이민자나 여행자처럼 행동하면 스몰토크 마니아도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내가 분위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교실 아닌가. 어딘가 존재하는 나의 외향인 에너지를 한껏 끌어올려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Welcome to the class!"
그 뒤 나는 많은 말을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두 명의 서로 모르는 어색한 학생들과 번갈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연결되어 있지 않은 프로젝터와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다 셋업이 끝나있어야 할 학교 컴퓨터 계정의 비밀번호는 계속 에러가 떴다. 나의 문제는 해결도 못했는데,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이 등록을 며칠 전에 해서 시스템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 신이시어. 다행히 친절한 경비원분 덕분에 IT직원이 나타났고, 수업 10분 전 프로젝트와 나의 계정문제는 해결했다. 그 사이 더 많은 학생들이 속속 등장했고, 반이상의 학생들의 계정 비밀번호가 맞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이중 내가 가장 선생님답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첫 수업이라고 나름 잘 차려입었지만 등장하는 학생들마다 꽤나 포스를 풍기며 나타났다. 직장인들이 많은 수업인걸 알고 있었지만 주로 30대나 40 대일거란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보니 학생들의 직업과 이 수업을 듣는 이유가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분은 뉴욕에서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라고 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의 직원들이 프로젝트 모델링과 모든 디자인 작업을 하지만 본인도 디자이너 출신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맡는 소수의 고객들이 있는데 원래 손으로 하는 스케치로 의사소통을 해왔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더 많은 고객들이 컴퓨터로 만든 실제적인 이미지를 보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 바쁜 스튜디오일 사이에서 직원들에게 작은 부분까지 수정을 부탁하는 게 굉장히 불편해졌다고 했다. 처음엔 직원들에게 조금씩 배워보려고 시도했지만 역시나 아는 사이에 어설프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배우단 관계가 어긋나기 십상이다. 결국 정식 클래스를 찾다가 회사 스케줄과도 맞고 평이 좋은 이
학교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 학생 말고도 유명 브랜드의 크리에이디렉터, 공연 무대 안무가, 조경 전문가 등등 평범해 보이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내가 가르치려는 프로그램을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 끝났다!
어떤 무대에 오르는 사람처럼 첫 수업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구상하고 갔지만, 역시나 실제상황은 너무 변수가 많았다. 처음 한 시간은 컴퓨터 세팅이 안된 학생들을 도와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진땀을 뺐다. 겨우 정리를 하고 준비된 수업을 시작했을 땐 이미 너무 신경을 많이 쓴 탓에 편두통에 시달렸다. 혹시라도 머리가 하얘질까 봐 무한 반복 연습하고 온 탓에 다행히도 첫 번째 수업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9시가 넘어서도 질문공세를 퍼붓는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다 학교를 나오니 밤 10시가 다 되어간다. 지하철을 타고 브루클린 집으로 향하니 밤 11시가 되었다. 이게 바로 진이 빠진다는 거구나. 푹 물에 담긴 스웨터처럼 무거운 몸을 가지고 집에 걸어가는데, 기운은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첫 수업'이 끝나서였을까, 아니면 예상치 못한 독특하고 다양한 학생들과의 만남 때문이었을까.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 겨울 늦은 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왔지만
새로운 시작의 기분 좋은 설렘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