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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Apr 27. 2024

나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반복, 또 반복을 이어갔다

인내심을 무기로 삼아

저의 재능은요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있다고 한다. 보통 어린 시절 어떤 경험을 통해서 그 재능을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미술이나 음악을 통해 재능을 발견해 가는 시간이 아니라, 병약한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10대가 돼서 여전히 몸이 아주 튼튼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남들 같은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나는 나만의 재능이라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재능'이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특별해야 할 것 같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학창 시절 재능이 많다는 평을 받는 친구들의 모습은 항상 비슷했다. 춤이나 노래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친구들, 남들 앞에서 말을 잘하고 발표에 뛰어난 친구들, 운동 신경이 뛰어나 언제나 반에서 대표로 출전하는 친구들, 그림을 잘 그리거나 악기를 잘 다루는 친구들.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중에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남들보다 특출 나게 잘하는 게 없어서 나는 그저 공부를 적당히 잘해서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이때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재능이란 말이야, 그렇게 특별하고 남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것만 있는 게 아니야. 타인의 말을 귀 기울여 잘 들어주는 것도 재능이고, 누군가의 아픈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야. 순수하게 무언가에 빠져서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고, 목표를 향해 노력할 줄 아는 성실함도 재능이란다. 오히려 살아가면서 더 중요한 재능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단다."


 어쩌면 누군가 말해줬어도 어린 시절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나의 재능을 찾아 방황한 시간이 길다. 누구에게나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하는데, 대체 나의 재능은 어디에 꽁꽁 숨어서 나타나지 않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평생을 찾아 헤매던 나의 재능을 드디어 발견한 순간이 왔다!


반복의 늪에 빠지다


  진땀 빼던 첫 번째 수업이 끝나고, 두 번째 수업 시간이 되었다. 다행히도 수업을 취소한 학생 없이 모두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첫 시간에는 이론적인 설명이 주를 이뤘었다. 스케치업이란 모델링 프로그램을 난생처음 열어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초 중의 기초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직접 손으로 작업하는 프로그램은 백번, 천 번 말로 설명을 들어도 직접 뭔가를 만들어 보지 않으면 감이 잘 오지 않는 법이다.


 일단 가장 기초적으로 이 프로그램 안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아주 간단한 집 모형을 다운로드하게 하고, 그 안에서 집의 아래, 위, 옆, 그리고 실내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연습을 했다. 시범을 보이고 학생들의 상태를 보기 위해 돌아다니니 꽤나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 그럼 이제 빈 집의 공간들을 가구로 채워보는 연습을 해보자.


최대한 간단한 것들을 골라서 가구를 집안 공간에 배치하는걸 일단 시범적으로 보여줬다. 아주 기본적인 연습이어서인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액자를 간격에 맞춰서 벽에 배열하는 걸 보여주는 순간, 여기저기서 도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였을까. 무한 반복의 늪에 빠진 사람처럼,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건축가인 아빠의 영향인지 3차원 공간이라는 개념을 처음부터 그렇게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수업을 통해 배운 건 3차원 공간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에 개인차가 아주 크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몇 번을 보여주고 반복하면 잘 따라왔지만, 그중 2-3명의 학생들이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특히 나이가 조금 있는 학생들은 옆에 앉아서 설명하고 자신도 직접 해본 뒤, 다시 가서 지켜보면 또다시 같은 문제로 헤매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 진도를 늦춘다는 미안함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두뇌와 손을 원망하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그들을 보니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도전한다는 건


 교실은 학생들의 머리에서 나는 김으로 후끈 뜨거워졌다. 잠시 쉬는 시간을 주고 나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학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두 명의 남자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다가오더니, 자기는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런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기엔 자신의 뇌가 너무 녹슨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사람마다 이런 공간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처음에 기본적인 개념을 빨리 이해해도 나중에 디자인적인 부분으로 빠지면 헤매는 학생들이 있고, 처음에 개념이 확 와닿지 않아서 느리게 배우다가도 나중에 아주 빨리 성장하는 케이스가 있다고 했다. 이미 과부하가 온듯한 그의 뇌가 내 말을 제대로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인내심이라는 재능


 나의 진심이 통했는지, 쉬는 시간마다 담배 연기를 뿜어대던 그 학생은 끝까지 나와 함께 가주었다. 4주 차쯤 한 명의 학생이 그만둔 걸 제외하면 모두를 이끌고 끝까지 수업을 완성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드디어 나의 숨은 재능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이해가 느린 이들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같은 것을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 일이 나에겐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10번, 20번을 설명해야 해도 그게 지치고 짜증 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까지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 학생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랬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무언가 어설프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향했다. 왠지 알아서 다 잘하고 뛰어난 사람들에겐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학생들에게도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항상 조금 느린 학생들 곁에서 머물렀다. 물론 수업이 진행될수록 실력차가 너무 벌어지면서 앞서 나가는 학생들도 배려해야 했다. 내가 찾은 방법은 같은 수업 내용을 활용한 어려운 문제를 몇 개 가져와서 기본적인걸 다 한 학생들에겐 자율적으로 연습할 문제를 주었다. 물론 이것도 빨리 풀고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룹 수업이라는 특성상 모두에게 일대일 수업의 퀄리티를 제공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의 숨은 재능은 나 혼자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평가서에 하나같이 나온 말이 "She is extremely patient."였다. 한국어로 하면 "그녀는 아주 인내심이 기가 막혀요." 정도일까. 나의 숨은 재능을 찾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지만, 사실 난 더 큰 걸 얻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나이에 상관없이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우려는 그 모습은 너무 아름답다. 사회적으로 이룬 게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취약하게 내려놓는 일을 어려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느리지만 천천히 나아가는 삶의 자세.


이렇게 어설프고 부족했던,

나의 첫 미국에서의 수업은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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