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수업을 완성한다는 건
나도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걸
내가 미국에서 처음 강의를 하게 된 학교는 맨해튼에 위치한 New York School of Interior Design이라는 곳이었다. 줄여서 NYSID라고 불리는 이곳은 뉴욕의 부촌인 Upper East Side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6년에 인테리어 디자인만을 중점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사립 예술 학교이다. 맨해튼 어퍼이스트 사이드의 고급 주택과 비슷한 느낌의 외형에 오래된 목재 나무로 된 커다란 문이 고급스러움을 풍긴다. 인테리어 디자인과 관련된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 과정이 있고, 그 외에도 공간 디자인과 관련된 많은 다양한 수업을 제공한다.
내가 가르치게 된 수업은 Continuing Education Program(평생교육 프로그램)의 일부인 SketchUp Modeling 수업이었다. 스케치업은 공간 디자인을 하는 인테리어나 건축 쪽에서 많이 사용되는 3D 모델링 프로그램 중 하나다. 처음 출시되었을 때는 완성도나 제공되는 서비스에 제한이 많아서 전문 디자이너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완성도가 올라가고 유저들이 많아지면서 지금은 꽤나 많은 공간 디자인을 다루는 업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처음 스케치업을 알게 된 건 학부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던 2011년쯤이었다. 그땐 학교 과정 중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Drafting수업이나, 색연필로 공간을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는 Hand Rendering 수업만 있을 뿐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진 않지만 어디선가 들은 이 모델링 프로그램에 관심이 생긴 나는 유튜브나 인터넷을 찾아보며 하나씩 사용방법을 익혀나갔다. 다행히도 사용자가 이용하기 어렵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아니어서, 기본적인 툴만 익히고 바로 프로젝트에 사용해 가며 점점 익숙해져 갔다.
학교를 졸업한 뒤 회사를 옮겨갈 때마다 더욱 복잡한 모델링 프로그램을 익혀야 했다. 당장 회사 프로젝트에 투입되어야 하는 나에겐 제대로 프로그램을 마스터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다행히도 너무 운이 좋게 회사에서 선배 디자이너와 매칭해 주며 연습 프로젝트를 주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로 우주의 에너지를 모아 정신집중해서 3D Studio Max나 Cinema 4D 같은 복잡한 프로그램을 일을 통해 배워나갔다.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이런 모델링 프로그램은 그 기능이 무한히 많아서 누군가 쉽게 "나는 이 프로그램 마스터했어!"라고 말하기 굉장히 어렵다. 다만 그저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분야의 프로젝트를 완성할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딱 내 아이디어나 콘셉트를 비주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있었고, 경험 공간 디자이너로서 나에겐 그 정도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내가 이 수업을 누군가에게 가르쳐주어야 하는 입장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총 세 단계로 나뉘는 이 수업 중 가장 첫 단계는 그 대상이 스케치업이란 프로그램을 한 번도 만져보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일단 학교에서는 나에게 커리큘럼을 알아서 짤 수 있는 권한을 일임해 주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막막했다.
"저기요, 커리큘럼이라는 거 어떻게 짜는 건가요?"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티칭 경험이 있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저런 어이없는 질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수없이 많은 영어과외를 했으니 그것도 Personal Tutoring 즉, 개인 교습 티칭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건 일대일 수업이었고, 한 학기에 달하는 3시간짜리 수업을 여러 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달랐다.
이게 맞는 건지
나도 유튜브나 일을 통해서 배운 걸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프로그램을 처음 만진 것도 십 년이 넘어서 완전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들의 마음을 기억해 내기도 어려웠다. 고민 끝에 나는 온라인 교육 사이트 중에 유명한 곳에서 가장 인기 많은 강사들의 강의를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프로그램이어서 잘 짜인 수업이 많았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수업을 반복해서 들었다. 여러 명의 수업을 듣다 보니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가장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사람의 방식을 부분 부분 나의 강의노트에 정리해 나갔다.
정신없이 뒤섞인 노트는 전혀 '커리큘럼'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Week 1, Week 2 이런 식으로 분류해 나갔다. 다행히도 한참의 시간을 들인 후 내가 가르치는 수업의 커리큘럼으로 보이는 강의계획서가 완성되었다.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배운 사실이지만, 실제 강의는 이렇게 잘 짜인 커리큘럼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실 온라인에 나온 강의를 그대로 카피해서 수업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 하는 거 남의 강의를 베껴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나의 수업은 대부분 직장 있는 사람들이 또 다른 목표나 꿈을 가지고 힘든 몸을 이끌고 오는 시간이었다. 그들의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최대한 쉽고 이해하기 쉬운 수업을 하고 싶었다.
수업을 준비하다 보니 지식이 많은 사람이 꼭 잘 가르치는 건 아니라고 했던 말이 실감이 갔다. 수업은 나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자랑하는 시간이 아니다. 어미새가 아기새에게 음식을 줄 때 꼭꼭 씹어서 먹기 편하게 넘겨주듯, 나도 내가 가르치는 내용에 한해선 그 지식을 꼭꼭 잘게 씹어서 학생들이 이해하기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어내야 했다.
"다들 이렇게 시작하겠지."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겠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나 스스로를 토닥이며,
그렇게 하나씩 첫 수업을 준비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