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은 디자이너 Apr 13. 2024

학교 개강 한 달 전, 나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같은 꿈을 계속 꾸는 이상한 병

원인이 뭔가요?


 미국에 온 후 언제부턴가 같은 꿈을 수없이 반복해서 꾸었다. 처음 꿈은 내가 어떤 시험장에 들어가서 시간이 부족해서 문제를 다 풀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마치 수능시험을 보던 시험장 같아 보였지만, 내 주변 학생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갯속의 교실이었다. 시험지를 제출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 까지도 정답을 마크하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번 같은 꿈을 꾼다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싶어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꿈보다는 해몽이라고 하지 않나. 다들 자신만의 해석과 나의 상황을 엮어서 무언가 그럴싸한 의미를 만들어냈다. 대부분은 내가 뭔가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해석했다. 나의 한 친구는 이렇게 해석했다.


"지금 미국에서 뭔가 도전하다가 한국에 가면 다시 수능을 봐야 한다고 무의식 속에서 생각하는 거 아닐까? 대학은 졸업했지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말이야. 근데 공부를 다시 해도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그 막연한 불안감이 뿌연 안개로 표현된 거지."


 그럴싸한 해석이었다. 미국에 와서 새로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며 한 단계 한 단계마다 고비가 왔고 그때마다 생각했다. "여기서 멈추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이도 저도 아닌 이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 인생은 망한 건가? 나는 성과 없이 돌아온 낙오자일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나이 때에는 나의 그릇이 딱 그 정도였던 것 같다.


두 번째 악몽


그렇게 한동안 지속되던 첫 번째 악몽은 몇 년이 지난 뒤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아, 이제 더 이상 같은 꿈을 수도 없이 꾸는 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구나.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이도 얼마 가지 않아 나에게 새로운 악몽 레퍼토리가 시작됐다.


 이번에도 배경은 학교였다. 나름 중, 고등학교 시절을 나쁘지 않게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왜 나의 모든 악몽의 배경은 학교 교실인지 알 수가 없다. 내용은 참 간단했는데,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끊임없이 학교 수업에 늦는 것이었다. 학교에 조금 늦는 게 뭐 대수일까 싶지만 포인트는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늦는다는 것이었다. 이건 첫 악몽처럼 같은 장면이 무한반복 되진 않았지만, 이상한 건 마지막 장면은 항상 같다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멀지도 않은 학교까지 제시간에 가지 못하고 나는 결국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장면에서 끝이 났다. 이 꿈이 왜 이렇게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생각해 보니 꿈속의 나는 어릴 적의 나의 모습이었다. 정확히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꽤나 어려 보이는 꿈속의 나에겐 학교 가는 길이 마치 험난한 모험길처럼 보였다. 곳곳에 숨어있는 마녀들을 물리치며 목적지에 도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처럼 학교 가는 길이 그토록 힘든 여정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꿈은 나의 늦는 것에 대한 지나친 강박으로 생긴 게 아닌가 싶다. 나는 평소에도 일찍 일어냐야 하는 일이 있으면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 걱정이 심해지게 된 계기가 있다.


 엘에이에서 일할 당시 우리 팀의 주 고객인 닌텐도의 시애틀 본사에 출장 갈 일이 많았다. 엘에이에서 시애틀까지 비행기로 대략 3시간 거리라서 사실 당일치기를 하기는 쉽지 않은 거리다. 하지만 타이트한 예산으로  항상 새벽 5시나 6시 비행기를 타야 했고, 한두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려면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했다.


 혼자 살던 나에게 새벽 3시 기상은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다들 어떻게 잘 알아서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알람만 6-7개를 맞추고, 그것도 불안해서 탁상시계에 있는 알람도 맞추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혹시 못 일어나서 비행기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압박에 새벽 1시부터 잠이 깨곤 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나의 늦잠에 대한 압박이 두 번째 무한반복 악몽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또 시작인가


다행히도 엘에이 직장을 그만두고 나의 지각 악몽은 사라졌다. 꽤 몇 년을 반복되는 악몽이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새로운 악몽 레퍼토리가 시작되는 징조가 보였다. 그 시작은 바로 내가 미국에서 수업을 하기로 예정된 개강 한 달 전부터였다.


 수업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나의 압박감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잠이 들면 나는 같은 꿈을 꾸었다. 이번은 여러버 전의 레퍼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한 장면이었다.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 앞에 서있었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참 정직한 꿈 아닌가 싶었다. 그건 내가 현실적으로 걱정하던 장면을 그대로 꿈으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평소에 10분짜리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도 압박감이 심한데, 도대체 무슨 재주로 3시간을 영어로 학생들 앞에서 혼자 떠든단 말인가.


이제라도 말하자.


“저 안 할래요.

아니요, 못하겠어요.”




이전 02화 나의 첫 가르침의 기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