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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Apr 07. 2024

나의 첫 가르침의 기억

나를 미국에 보내준 고마운 영어과외

나의 첫 과외의 기억


나의 첫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쓰려고 했는데 '영어과외'라는 말을 들으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태어나 처음 받은 그룹 영어과외에 대한 기억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 부모님께 공부 좀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내가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기 때문이 아니다. 크게 말썽을 피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내 성적만은 극과 극을 오갔다. 마음먹고 공부하면 확 앞으로 갔다, 다시 뒤로 쭉 밀려서 이게 같은 사람의 성적인가 싶은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건 '할 놈은 알아서 한다'라는 부모님의 교육철학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한 번도 이런 철학이 있었냐고 부모님께 물어보진 않았다. 다만 엄마는 종종 나에게 말했다. "공부와 인연이 있으면 알아서 할 거고, 아니면 또 알아서 갈길을 찾겠지." 초등학교 시절 숙제를 안 해가도 너 스스로 혼나도 보고 책임을 지면서 배우라고 말하던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엄마였다.


이런 방임주의 덕분에 나는 친구들처럼 이 학원 저 학원 쫓기듯 다녔던 기억이 없다. 오히려 내가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학원에 보내달라고 말했던 적은 있다. 이렇게 나의 인생에 그다지 사교육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없었지만, 정말 우연히 하게 된 영어과외가 어쩌면 나의 인생을 바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 영어 좋아하네?


내가 자란 동네는 대전에서도 가장 학구열이 뜨겁다는 소위 '대전의 강남' 같은 곳이었다. 친구 중에 각종 스포츠부터 악기, 외국어까지 학원을 8개 이상 다니는 친구들이 꽤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저런 방임주의 철학을 유지한 부모님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던 중 아파트 내에서 하는 영어 그룹과외에 낄 수 있는 우연한 기회가 생겼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이 영어과외 덕분에 미국에 와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다. 그때 나를 꼽사리로 넣어준 그 이웃 친구 어머니께 가끔 만나면 아직도 고맙다고 말한다고 했다.


 과외라는 걸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던 나는 친구들과 섞여서 영어 공부하는 게 참 즐거웠다. 단어를 외워가서 제일 많이 맞추는 그 희열에 꽂혔던 것 같다. 과외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시작된 나와 영어와의 관계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쭉 이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영어가 항상 친숙하게 다가왔고, 나에게 시련을 주던 물리 같은 과목에서 받은 상실감을 나는 영어에서 회복했다.


물론 나와 영어의 사랑이 넘치는 애정 관계는 내가 미국에 오자마자 처참히 부서졌다. 내가 꽤나 잘한다고 믿었던 나의 영어실력은 오직 시험 영어에만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은 말도 잘하고 듣기도 잘한다는데, 우리 때는 그저 단어를 많이 알고 독해를 빨리하면 그게 '영어의 신'으로 가는 길이라 믿었다.


밥벌이로서의 영어


고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았기에 나에게 알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레스토랑, 단기 판매 알바, 라이브 바 등 여느 대학생들처럼 다양한 알바의 세계의 경험했지만, 결국 날 먹여 살린 건 또다시 고마운 영어였다. 한때 외무고시와 편입, 별 선택지를 다 펼쳐놓고 인생을 고민하던 때 이러나저러나 영어를 마스터해야겠다는 생각에 한 1년 미친 듯이 공부했던 적이 있다. 그 덕에 나름 쌓은 노하우로 어렵지 않게 영어과외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주로 고등학생들을 위주로 수업했는데 이 친구들과 일대일로 수업하는 게 참 재미있었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그땐 마치 내가 엄청난 어른이 된 것처럼 인생상담도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봤자 내가 아주 애기로 봤던 그 학생들과 나의 나이차는 한 3,4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대학생이라고 나를 엄청 어른으로 봐주었던 그 아이들과, 스스로 엄청 성숙한 어른인 것처럼 행동했던 나, 떠올려보니 우리 모두 참 귀엽다.


그렇게 영어는 나에게 밥벌이의 귀중한 수단이었고,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꽤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미국에 가겠다고 결심한 뒤 휴학을 한 나는 본격적으로 직업적 과외선생님이 되었다. 긴 시간 이 생활을 이어간 건 아니었지만, 온 동네방네 전단지를 붙이고 돌아다닌 덕에 난 한 번에 8개의 과외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보통 주 2회 2시간이었으니, 그냥 하루종일 수업만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때도 몸은 피곤했지만 다 제각각인 학생들을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고,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걸 알려주는 그 자체에 보람을 느꼈다. 


물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지라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의 한계를 시험해 보려는 듯 제멋대로 행동하던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을 가르칠 때는 결국 어머님께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3인데 정말 너무 공부에 재능이 없는 학생을 가르칠 때, 학생보다 간절한 눈빛의 어머니는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음속으론 우리 엄마를 빙의해서 솔직하게 말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 ㅇㅇ이는 공부 쪽으로는 아닌 거 같아요. 차라리 본인이 하고 싶은 쪽으로 밀어주시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수업을 갈 때마다 정성스럽게 깎은 과일이며 간식을 잔뜩 준비해 주시고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린다고, 선생님만 믿는다는 어머니께 차마 그런 말을 드릴 수는 없었다.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알바였지만 과외를 통해 처음 입문한 "가르치는 사람"으로의 길은 나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겼다. 한참 예민하고 힘들 수험생시기에 함께 한 시간들이 큰 힘이 되고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음을 들었을 때 돈보다도 큰 보람을 느꼈다. 비록 지금은 연락이 되는 학생들은 없지만 지금 어디선가 사회구성원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이렇게 누군가를 가르쳐본 경험은 나에게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무언가를 쉽게 가르치는 재능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인내심 있게 설명하는 것이 재능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때의 기억으로 나는 미국에 디자이너로 살면서도 언젠가는 한 번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냥 막연하게 가끔 떠올려 보는 정도일 뿐이었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시험 영어를 가르치는 건 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영어로 디자인을 가르친다?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음속에는 계속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이라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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