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은 디자이너 May 05. 2024

그때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면 돼.

조건 없는 베풂의 힘은 강력하다.

인연의 힘


  나의 인생에는 귀인이 참 많다. 가족이나 친척 하나 없는 미국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인생의 위기마다 나타나 나를 구해준 '인생의 귀인들' 덕분이었다. 배고프던 유학시절, 아무 대가 없이 가끔 나를 집으로 불러서 그토록 먹고 싶던 떡볶이를 해주던 언니가 있었다. 벌써 17년 전쯤이고, 뉴욕이 아닌 메릴랜드의 작은 소도시였던 그곳에서 한국음식을 먹으러 가긴 쉽지 않았다. 물론 차가 있고, 돈이 넉넉했다면 한국음식을 못 먹어서 걸린 그 지독한 향수병으로 고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외로운 타지 생활에 나의 배고프고 외로운 영혼을 달래준 사람들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고마운 많은 사람들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디자인을 공부한다고 미국에 왔지만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심하게 방황을 하던 시간이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유학원에 미국 디자인 대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 한 번의 상담도 받아보지 않고 미국으로 그저 무작정 와버린 나였다. 그렇게 찾아가게 된 한인이 하는 아트 스튜디오가 있었다.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한 그곳은 꽤나 전문적인 체계를 가지고 아트 스쿨 포트폴리오 작업을 도와주는 곳이었고, 선생님들도 대부분 현직 미국 아트스쿨 교수들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등록은 했지만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나는 다른 학생들의 진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침 10시부터 밤까지 매일 작업하는 학생들에 비해 나는 아침 7시부터 4시까지 델리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미친 속도로 달려와도 4시 반이 넘어갔다. 게다가 주말 내내 하루 12시간을 다른 곳에서 일해서 도저히 작업을 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헐레벌떡 뛰어서 교실에 들어가서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미술용품을 펼치고 있으면 왠지 아무도 주지 않는 눈치가 보이곤 했다.


"저 언니는 나이도 많아가지고, 왜 저렇게 맨날 늦게 오고 과제도 안 해오지?"


 모두 꽤나 잘 사는 부잣집 유학생들이었기에 그들의 눈에는 내가 굉장히 이상해 보였을 것이라, 나 혼자 생각했다. 사실 아무도 나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다들 순수하고 착한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나의 못나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은 자꾸 그들이 하지도 않는 말을 나의 귀에 속삭였다.


아, 이런 진상을 봤나


 기존에 미술을 해본 적도 없는 나는 작업을 하는 내내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었다. 나도 눈이 있기에 내 작품과 다른 학생들의 작품을 보면, 이건 진짜 피카소의 그림 옆에 웬 유치원생이 끄적인 장난스러운 낙서 수준으로 보였다. 거기에 다른 학생들은 1-2년 잡고 입학준비를 하는데, 나는 아무리 알바를 해서 학비를 벌어도 최대 6개월 이상은 다닐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미술 용품이 얼마나 비싼지, 뉴욕의 방값이 얼마나 살벌한지, 나는 막상 일을 벌이고야 알게 되었다.


고민 고민 끝에 상담실을 찾아갔다. 학생들의 상담을 맞아주시던 남자 실장님이 계셨다.


"실장님, 저 그만둬야 할거 같아요."


쌓일 대로 쌓인 향수병,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

지칠 대로 지친 나의 영혼.


나는 이 말을 내뱉자마자, 실장님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실장님도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었다. 이제 20대 후반,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하지만 그땐 나만 세상에서 가장 작고 사소한 먼지처럼 작게 느껴졌고, 뉴욕이란 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들 뭔가 이룬 사람들처럼 거대하고 대단해 보였다.


한참을 울던 나를 기다려주던 실장님이 말했다.

"너 실력 있어. 내가 학생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겠어. 나를 믿고 조금만 더 해봐."


 물론 나는 실장님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을 믿고 계속 가보라는 그의 묵직한 말에 힘을 얻어 하루, 또 하루, 그렇게 멈추지 않고 조금씩 나아갔다. 그렇게 나는 힘들 때마다 실장님을 찾아갔다. 정말 생각해 보면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었을 것이다. 하루 건너 매일 상담실로 찾아가 포기하는 게 맞겠다고 말하는 나에게 화 한번 낸 적 없는 그분은, 사실 살아있는 부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나는 눈물과 자기부정 속에서 19개의 포트폴리오에 넣을 작품을 완성했다. 다른 학생들이 100개 정도의 작품에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속에서, 나는 최소 제출해야 하는 20개를 채우지 못함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없는 그림이 어디서 나타날 것도 아니고, 사실 그때의 나는 너무 지쳐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더 컸다. 이만큼 해봤고 노력했는데 안되면 그게 내 운명이리라, 그냥 담담한 마음이었다.


왜 도와주시는 거예요?


미국에 디자인 학교에 지원하려면 포트폴리오를 전문적으로 찍어서 그걸 디지털 형식으로 정리해서 내야 했다. 물론 나는 그것도 몰랐지만 말이다. 여기서 내가 간과한 건 '전문적으로'라는 부분이었다. 그냥 자기 집에서 카메라를 가져와서 찍은 그런 게 아니라, 조명이 모두 갖춰진 스튜디오에서 전문 사진사가 촬영을 한 것을 내는 것이었다. 작품을 완성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산 넘어 산이었다. 게다가 나는 곧 한국에 엄마가 수술을 해서 입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실장님께 그냥 친구한테 부탁해서 최대한 잘 찍어보겠다고 말했다. 사실은 전문 사진사가 작업해 주는 비용은 2000불이 넘었다. 한국돈으로 하면 30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는데 이게 벌써 15년도 더 된 시절의 가격이니, 그땐 그 돈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하고 친구와 서둘러 사진촬영을 하고 사진을 모두 컴퓨터에 담고 한국으로 입국해서 엄마 간호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사진 촬영했으니까, 이걸로 제출해."


실장님에게 온 이메일이었다. 너무 놀라 파일을 열어보니 나의 겸손하고 소박한 19개의 포트폴리오 작업물이 찍힌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당연히 친구와 함께 어설픈 조명으로 찍은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좋은 퀄리티의 사진들이었다. 실장님은 아트 스쿨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와 같은 유학생 출신이었다. 사진 전공으로 뉴욕의 유명한 아트스쿨을 나와서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었지만, 그걸로 생계가 유지되지 않아 낮에는 아트 스쿨에서 일하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사진 작업을 한다고 했다.


너무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며 한마디 덧붙였다.


"왜 아무것도 안 받고 도와주시는 거예요?"


나의 이런 당돌하고 어이없을 질문에 짧은 답장이 왔다. 자신도 나와 같은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준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가 되면, 그때 누군가에게 돌려주면 된다고 말했다.


 나에게 이 경험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이건 마치 내 인생의 나침판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건 없는 베풂의 힘을 믿게 되었고, 특히나 나와 같이 꿈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욱 마음이 간다. 나의 경력이 조금씩 쌓인 순간부터 후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멘토쉽같은 상담을 해주었고, 그들이 필요한 추천서나 서류 등을 조건 없이 도와주었다.


 처음엔 내가 받은 친절에 대한 마음의 빚으로 시작했지만, 그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서 누군가의 꿈에 행하는 '가르치는 사람'의 길로 나를 이끌어 준 게 아닌가 싶다.





이전 09화 누군가의 꿈의 여정에 함께 한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