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은 디자이너 May 12. 2024

MBTI로 자기소개하는 교수 본 적 있나요?

떨리는 첫 수업의 기억

I am an INFJ!


정확히 기억난다. 2020년 여름이었다. 내가 MBTI의 열풍 속으로 빠져든 것이. 물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게 아닌 것도 알고 이것을 맹신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고 있다. 한참 지나치게 빠져든 건 사실이지만, 이걸로 사람을 판단한다던지, 지나친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솔직히 말하면 친한 지인들의 MBTI는 따로 정리해서 휴대폰에 메모해 둔 정도로만 신뢰한다.)


내가 MBTI에 빠진 건 이걸 통해 나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참 '나에 대해 알아가기'에 심취했던 시기였다. 놀랍게도 인터넷엔 이미 나보다 MBTI에 더 깊게 빠져든 사람들이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 써놓은 글이 넘치고 넘쳤다. 글도 어찌나 그렇게 표현력이 좋게 잘 써놓았는지 웬만한 책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게 내가 찾아본 나의 MBTI인 인프제(INFJ)에 대한 설명은 내가 아는 나의 성격과 90%쯤은 일치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나의 부족한 언어실력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깊숙한 생각이나 성격이 글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누가 내 머릿속에 잠시 들어와서 스캔을 한 느낌을 받는 표현도 많았다. 참 이상하고 나 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한 이런 예민하고 모순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는 어려움을 토로한 글에서는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문제는 내가 이토록 MBTI에 심취해 있던 시기에 첫 강의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교수가 첫날 자기소개에 본인의 MBTI를 밝힌단 말인가. 나조차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다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날 밤 침대에서 무한 이불킥을 하고 있었다.


32개의 눈동자


 첫 강의날이 다가왔다. 이미 영어로 수업을 많이 해봐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뱃속을 누가 휘잡고 다니는 듯 극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직 여름의 끝자락을 지나던 8월 말, 익숙한 캠퍼스를 지나 대학원 전용 강의실로 들어섰다. 불과 몇 년 전, 나도 여기 앉아서 수업을 듣고 하루종일 친구들과 프로젝트 작업을 하던 곳인데, 학생들을 가르치러 이곳에 서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의 수업 시간은 매주 금요일 아침 9시 10분부터 12시까지였다.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다. 보통 우리 과의 수업은 아침 10시에 시작할 뿐 아니라 금요일은 수업이 없는 날이다. 그러나 회사의 사정상, 일주일 중 유일하게 뺄 수 있는 시간이 이때뿐이었다. "과연 학생들이 모두 제시간에 올까?"라는 걱정과 나 때문에 바뀐 스케줄에 미안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9시쯤 되니 학생들이 한 두 명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미리 단체 사진을 받아서 얼굴을 익혀두었는데, 실제로 보니 처음 본 얼굴처럼 낯설다. 또한 코로나가 한참이던 시절이라 모두 본인의 얼굴의 절반은 덮어버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내 우려와는 달리 모든 학생들이 수업 시간 전에 도착했다.


나 또한 마스크를 써야 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까, 단전에서 힘을 모아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Hello everyone!

Welcome to the class!"


16명의 학생들,

그들의 32개의 눈동자가 나에게 집중됐다.


진심이 통하길


 수업이 시작하기 한참 전, 학장에게서 학생들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가 담긴 파일을 받았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익혀가며 그들의 전공과 포트폴리오에 담긴 기술적 실력과 전반적인 특징을 노트에 모두 기록했다. 내가 경력이 수십 년 되는 다른 교수들보다 많은 지식을 가질 순 없으니, 대신 나는 학생들 개개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조금 더 세심하게 그들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같은 역할로 접급해야겠다 생각했다.


나의 경험을 비추어 보아도 개인적인 실력이 뛰어나고 경력이 많은 교수들은 자신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집중했다. 당연히 아는 것이 많으니 그들에게도 배울게 많았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서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또한 가끔 어떤 교수들은 자신의 일이 너무 바쁘기에, 학생들의 프로젝트에는 관심이 없었다. 매주 피드백을 주고 이끌어주어야 할 교수가 학기가 한참 시작한 뒤에도 내가 하는 프로젝트 핵심조차 기억 못 하던 일도 있었다.


아직 경력도 짧고 스스로 자신감도 부족하던 나는 그저 진심 어린 자세로 다가가길 선택했다. 겸임교수라는 타이틀로 이 자리에 섰지만, 나는 아직도 배울게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 수업은 이번 학기에 유일하게 학생들이 처음부터 자신의 콘셉트를 잡고, 그걸 발전시켜 나가 자신만의 전시회를 처음으로 디자인해 보는 수업이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프로젝트를 끌어가는 것이고, 나는 그걸 옆에서 잘 가이드해 주는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Me too!


 마스크에 표정이 가려지니 학생들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조금 딱딱했던 분위기는 나의 개인적인 얘기로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나도 몇 년 전에 지금 학생들이 앉아있던 그 자리에 있어서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고,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학원이라 다들 성숙하고 두려움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학부 때보다 더 큰 부담감과 압박감을 안고 오는 학생들이 많다. 게다가 경력과 실력이 다양한 학생들이 섞여있어서 자칫하면 극도로 자신감을 잃고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이 나온다. 실제로 매 학기마다 한두 명의 학생들은 중도 포기를 한다.


나는 어차피 나와 나이도 그렇게 차이 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괜히 '나는 교수다!'라는 분위기를 형성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 그냥 몇 년 더 현직에 일찍 나온 선배라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다행히도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학생들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이력서를 통해서 경력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는 단 몇 줄의 경력사항이 말해주지는 않는다.


나름 성공적인 첫 수업을 마쳤지만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하나였다. 대체 왜 뜬금없이 나는 인프제라는 걸 밝혔는지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학생 한 명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목소리가 작고 부드러워서 내가 좀 더 가까이 가서 들어야 했던 학생이었다. 학생은 꽤 긴 이메일과 함께 나와 함께 하는 수업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메일의 끝에 나온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By the way, I am an INFJ too!"


자신이 인프제임을 밝힌 학생들이 무려 두 명이나 더 있었는데, 이들은 왠지 내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며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그다음 해부터는 MBTI 같은 건 나의 소개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나의 이런 엉뚱하고 솔직한 접근은 학생들과 나 사이의 벽을 허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전 11화 하나의 길이 또 다른 길을 열어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