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that matters
경쟁하러 여기 온 게 아니야
처음 대학원에 입학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시 디자인'이라는 그 단어의 무게를 느낀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랬다. 내가 그동안 다녀봤던 박물관이나 전시회는 모두 빈틈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잘 짜인 콘텐츠를 바탕으로 깊이 있게 전시회 주제를 다루는 걸 보면 그 완성도에 놀라곤 한다. 또한 보통은 그 규모가 너무 방대해서 그걸 내가 디자인할 거라는 생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압박감을 준다.
또한 워낙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이는 곳이라 자칫하면 서로의 실력을 두고 경쟁심이 생기기 십상이다. 특히나 공간 디자인 전공자들이 화려한 렌더링(디자인을 실제 모습처럼 시각화한 이미지)이나 건축 기술을 자랑하면, 비전공자들은 자신감을 잃고 심한 경우 멘털이 무너져 중도 포기까지 하고 만다.
우리 과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다양한 시선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다. 다른 국적과 나이, 전공자들이 모여서 어떤 문제를 보는 시점은 그 접근부터 전혀 다르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시너지가 발생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은 더 넓은 관점을 지닌 디자이너로 성장한다.
이렇게 학생들 사이의 시너지가 중요하므로, 첫 번째 학기에 학생들 사이에서 경쟁보다는 화합을 이끄는 분위기 형성이 중요하다. 이것이 내가 맡은 중요한 임무이기도 하고, 부드럽고 융화를 잘 시키는 나의 성격이 내가 이 강의를 맡게 된데 큰 영향을 끼쳤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긴장감을 풀기 위한 만국 공통의 주제는 바로 음식이다. 차갑고 경직된 분위기도 음식에 관련된 이야기 하나로 그 안의 공기까지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특히나 전 세계에서 다양한 학생들이 모이므로, 내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다양한 음식이야기가 나오고, 그 자체로 아주 흥미로운 대화거리가 된다.
그래서 수업 프로젝트 중 하나는 'Food that matters'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번역하면 '나에게 중요한 음식'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첫 시간에 수업에 관한 이런저런 소개를 하고, 여전히 경직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진행할 프로젝트 소개를 한다. 이때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각 나라의 음식얘기로 문을 열면, 아직 서로가 낯선 학생들 사이의 온도가 조금 따듯해진 느낌이 든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너희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진행하게 될 프로젝트 중 가장 재미있는 작업이 될 거라고 얘기한다. 단지 나의 수업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실제로 졸업생들에게 자주 듣는 피드백이다. 이 프로젝트는 내가 처음 시작한 게 아니라 대학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어진 어찌 보면 하나의 전통 같은 프로젝트다. 물론 내가 가르치게 되면서 내 방식대로 수정했지만, 학생들이 하나의 음식을 주제로 선택해서 콘셉트를 짜고 하나의 전시회를 완성해 간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What is your favorite food?"
끝없는 고민의 끝에
다음 주까지 전시회 주제를 정해서 발표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수업을 마친다. 물론 고려해야 할 사항은 있지만, 웬만하면 주제 선정에 자유를 주는 편이다. 자신이 열정을 느끼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주제여야지 디자인을 풀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결정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수업직전까지 고민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보통 수업 이틀 전까지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라고 말한다.
간단하게 자신이 정한 주제의 음식과 왜 그 선택을 했는지를 보내라고 말하면, 수업 직후부터 이메일이 쏟아진다. 보통은 두세 개를 고민하는 학생들이 각각의 주제가 왜 좋은 전시회를 만들지 나름의 이유를 포함해 보낸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음식을 고르면 재빨리 구글로 검색해 보고 간단한 조사를 한다.
그렇게 두 번째 주가 시작되었고, 학생들이 고민의 고민 끝에 고른 주제는 이러했다.
팝콘, 만두, 커피, Skittles(레인보우 색깔의 작은 츄잉 캔디), 스무디, 모찌(찹쌀떡), 크로와상, 오가닉 꿀, 버섯, Puchka(작은 공 모양의 튀긴 인도 길거리 음식), 브라우니, 치즈, Citrus(감귤류 과일), 포춘 쿠키, 바나나, Semla(스웨덴의 국민 디저트)
16명의 학생들이 고른 주제가 언제나처럼 참 다양하고 재미있다. 그저 '내가 좋아해서!'라는 이유로 고르지 않도록 이 음식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설명을 함께 발표하라고 말했다. 주제만큼 이유도 다양했는데, 자신의 나라 대표 음식을 고른 학생들은 그 음식의 깊은 역사와 그 속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고 했다. 팝콘을 고른 학생은 하나의 팝콘이 탄생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사람들에게 경험시켜 주고 싶다고 했다.
두 번째 수업이었지만 학생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 창의성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신나 하고 좋아하는 단계이다. 뭔가의 주제를 정하고, 머릿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다행히도 내 예상처럼 학생들은 자신의 주제를 발표하며 한껏 들뜬 목소리였고, 그 덕에 딱딱했던 강의실 분위기도 많이 느슨해졌다.
"학생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까?"
다양한 주제를 들으며 나도 너무 기대가 되었다. 또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창의성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을지, 어떤 방식으로 한 명 한 명의 프로젝트를 이끌어 주어야 할지 나의 고민도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