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을 넘어서는 창의력
적당히 타협하지 않기
내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I know you can do better."이라는 표현이다. '난 네가 더 잘할 수 있는 거 알아.'라는 의미로, 학생들이 처음 콘셉트를 잡고 아이디어 구상을 할 때 특히나 자주 하는 말이다. 물론 모든 학생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발표를 하는 학생들의 작업물을 보면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아 이 친구가 최대한 구상하고 생각해 낸 아이디어구나.' 또는 '어느 정도 생각해 보다가 그중에 적당히 골라서 온 거구나.' 이런 차이 말이다.
이런 감각은 디자이너로서 현직에서 일하며 쌓기도 하고, 그동안 나름 여러 학생들과 후배들의 멘토쉽을 통해 얻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게으른 디자이너가 감각이 없는 디자이너보다 더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시작하는 학생들이 '적당히' '대충' 이런 태도를 당연히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대부분 열정을 갖고 들어온 대학원이므로 내가 크게 푸시하지 않아도 다들 머리를 싸매고 아이디어를 구상해 온다. 하지만 때론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서 이런 '게으른 디자이너'가 되는 학생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만큼 창의력 있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또는 그 방식을 몰라서 안주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나는 여전히 유리멘탈을 가진 여린 학생들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을 만큼만 직설적인 피드백을 준다. 대부분 본인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최선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한다.
"What do you think?
Do you like how it is?"
"어떻게 생각해? 이대로가 괜찮은 거 같아?" 이렇게 물으면서 가볍게 다른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들을 넌지시 언급한다. 물론 해결책을 주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므로 절대 답을 먼저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도 이해하지 못하면 예시를 보여주면서 왜 본인의 아이디어가 색다르거나 독특하지 않음을 설명해 준다.
바나나로 뭘 할 수 있을까?
첫 학기에 운이 좋게도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은 남미에서 온 Jose라는 학생이었는데, 이 친구는 이미 유럽에서 학부 공부를 마치고, 무대 디자인 쪽으로 경력을 쌓고 대학원에 입학한 케이스이다. 공간 디자인에 대한 감각도 좋고,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경력도 있어서 전반적인 작품 완성도가 높았다.
처음 프로젝트 주제를 정할 때 그 많고 많은 주제 중에 바나나를 골라서 의외였다. 하지만 워낙 디자인 실력이 뛰어나서 내심 이 친구가 어떻게 프로젝트를 풀어갈지 궁금했다. 셋째 주가 되고 다들 각자의 리서치 과정을 발표하고 콘셉트 과정을 발표하는 날이 다가왔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길 원했기에 다른 제한을 두지 않았다. 손으로 스케치를 해서 표현해도 되고, 사진을 콜라주 방식으로 붙여도 되고, 글로 써서 표현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호세는 수업시간에 함께 했던 마인드맵(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정리해 나가는 방식 중 하나)과 함께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이미지 몇 가지를 모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표했다.
일단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구상한 콘셉트 스케치가 돋보였다. 이걸 바탕으로 어떤 아이디어를 구상했는지 한껏 기대하고 그의 발표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감을 주는 것들 중 가장 뻔한 아이디어를 골랐다.
Think Outside The Box
다른 학생이었다면 나는 아마 부드럽게 제안했을 것이다. "다른 아이디어도 재밌어 보이는 게 많은데, 그쪽으로 한번 다시 생각해 봐." 이 정도의 톤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의 포트폴리오에서 본 작품들은 굉장히 창의적이었고 독특했다. 자신이 훨씬 잘할 수 있음에도 안주하는 걸 보고 정말 이게 너의 최선인지 모르겠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뻔한 걸 할 거면 왜 굳이 (실제로 짓는다면)수십억에 달할 이런 전시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생각해 보라고 덧붙였다.
지금은 학생들의 작품이라 실제 건축물로 만들어지지 않지만 실무로 나가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땀 흘려 만들어낼 작품이다. 또한 야외에 지어질 이 임시 구조물 때문에 낭비될 수많은 자재들과 그걸 처리하면서 생길 쓰레기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까지 학기 초부터 파헤쳐 들어가지 않았지만, 나는 학생들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길 바랐다.
자신이 하고 있는 작품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만의 특별함이 없다면 굳이 이걸 만들어야 하는지 말이다. 이 전시회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또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하고 싶어서 이 모든 작업을 하는지가 명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전체 발표를 다 듣고 나서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대학원 과정 중에 예산이나 다른 제한사항 없이 정말 너희의 창의력 하나만 가지고 풀어갈 수 있는 프로젝트는 그리 많지 않다고 말이다. 이런 소중한 기회를 적당한 아이디어로 낭비해버리지 않도록 다시 한번 왜 내가 이 전시회를 열고 싶은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색다른 경험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해 보라고 말했다.
수업이 끝난 뒤 금요일 오후.
벌써부터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났다며 나에게 의견을 묻는 학생들의 이메일이 이어졌다.
아, 다행이다. 한편으로는 안도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친구들이 어떻게 이 아이디어들을 풀어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낼지 너무 기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