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이루어지던 날
상상 속의 꿈이었다
누구나 머릿속에서만 상상할 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생각하는 꿈이 있을 것이다. "설마, 정말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라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그런 일 말이다. 하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이게 과연 실현이 될까'라는 의구심에 그저 소심한 상상으로 만족하고 만다.
나에게는 그 꿈이 바로 내가 졸업한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이 학교는 온 열정을 쏟아서 공부했던 곳이고, 인간적으로도 너무 좋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 친구들과 작업하며 많은 성장을 하게 해 준 고마운 곳이다. 인생에서 언제 가장 몰입해서 살았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학원에 다녔던 시기를 꼽을 것이다. 디자이너로서 너무 부족한 나를 느끼면서 버거울 때도 많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 나의 노력을 알아봐 주고 이끌어주던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서 많은 지지와 응원을 받았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나는 내가 멘토라고 생각하는 우리 학과의 학장, Brenda와 종종 연락하고 지냈다. 딱히 다른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그저 안부 이메일을 보내고, 가끔 학교 근처에 있으면 수업에 들러 얼굴을 비추었다. 브랜다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누구라도 눈을 마주 보고 얘기하면 그 강력한 에너지에 빨려드는 기분이 드는 사람이다. 처음 갈길을 몰라 헤맬 때 우연히 브랜다를 만났고, 그 사람이 가진 엄청난 열정에 이끌려 '저런 사람이 가르치는 곳이면 그게 무엇이든 한번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12월 31일의 기적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한해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코로나의 영향으로 이례적으로 차분했던 2020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특별한 계획이 없어 그저 집에서 쉬면서 이메일을 열어봤는데 브랜다에게 메일이 와있었다. "음, 무슨 일이지?" 궁금증에 서둘러 메일을 열어보았다.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말과 함께 이번에 겸임 교수 자리가 하나 새로 나는데, 그 자리에 나를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작 네다섯 줄 하는 이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나의 의사를 알려주면 진행하겠다는 말에 바로 답장을 썼다. 물론 내가 가르치게 되면 너무 영광일 거 같다고, 내가 다음단계를 위해 준비할 게 있으면 알려달라고 적었다.
이메일을 쓰고 아직 된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학교에 참관수업을 갈 때 종종 생각했다. 언젠가 경력을 열심히 쌓으면 나도 한 15년쯤 뒤에는 대학원 수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내가 재학하던 시절 교수들은 모두 40대에서 50대 정도의 나이대였고, 경력도 보통 20년에서 30년 사이였기 때문에, 나는 갈길이 멀어 보였다. 강의제안을 받은 때가 내가 대학원을 졸업한 지 겨우 5년이 조금 넘었던 시기였고, 나는 아직 35살밖에 안된 그들에 비하면 애송이 수준이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그저 두려움에 놓쳐버릴 순 없었다. 게다가 나름 NYSID에서 몇 년간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름의 내공과 자신감이 조금 쌓인 상태였다. 아직 자세한 사항도 몰랐지만, 막연히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행복했다. 설령 내가 그 자리에 뽑히지 않아도 내가 멘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를 그런 자리에 고려해 준 자체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점과 점이 만나는 순간
스티브잡스가 'Connecting the dots'를 얘기하며 인생의 많은 점을 찍어두라고 했던 말이 이런 의미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찍어두었던 몇 가지의 일들이 나에게 이런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경험 삼아 시작하게 된 'Design Instructor'로서의 수업이었다.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건 어떤 걸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수업이었는데, 이 수업이 겸임교수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할 줄은 몰랐다. 또한 내가 그토록 막막해하던 커리큘럼을 직접 만들어서 가르친 경력이 큰 플러스가 되었다.
또 다른 건 그 수업을 통해 만난 개별 학생들에게 전반적인 공간 디자인 수업을 해준 경력이었다. 큰 뜻을 두고 한건 아니었는데, 이것 또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모이는 우리 과의 특성상 큰 경력으로 인정받았다. 건축이나 공간 디자인 전공자가 아닌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컨설팅해 주며 쌓은 노하우가 실제로도 수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미래를 보고 지금 하는 모든 일을 계획하진 않는다. 아니 그렇게 계획한다고 그대로 흘러가는 게 인생도 아니다. 그래서 다양한 많은 시도를 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점을 찍어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금 당장은 의미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때론 시도하다 실패하기도 하고, 시간 낭비만 하다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중 어떤 점들은 반드시 서로를 끌어당겨 예상치 못한 선으로 만날 것이다.
그 선들이 언젠가 서로 만나 도형이 되면,
그게 바로 내가 살아온 인생의 얼굴이 되지 않을까.
기왕이면 나의 얼굴은 조금 굴곡지더라도,
입체적이고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