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읽어줘야 맛!
나는 그림책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림책이 즐거움을 선사하며 상상력과 정서 순화, 나아가 치유에도 도움을 준다고 하여 몇 차례 시도를 해보았지만 나는 함빡 빠져들지 못했다. 나는 만화책조차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림책을 읽기에는 마음이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느긋하게 감상할 줄을 모른다. 빨리 읽어야 한다고, 그림 속에서 빠르게 뭔가를 찾아내야 한다고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림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젖어들지를 못한다. 만화책도 마찬가지다. 그림 보고 글자 읽고 하느라 마음만 번잡하고 피로가 찾아온다. 우리 아이는 중학생 무렵에 식객을 비롯하여 몇 가지 만화책을 적극적으로 내게 추천하였는데, 나는 가사일만로도 바빴고 그래서 만화책을 읽고 극적인 대목에서 공감을 나누는 좋은 찬스를 놓쳐버렸다. 우리 아이는 한동안 서운함을 여러번 표현했을 뿐 아니라 만화의 맛을 모르는 엄마를 몹시도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림책을 읽을 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손을 놓을 수 없거나 이야기가 아주아주 재미있고 흥미진진해 이야기에 빠져드는 스토리 위주의 그림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나의 최애 그림책은 윌리엄 스타이그의 < 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이다. 조약돌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실베스터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분홍색 조약돌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중에 사자 한 마리를 만난다. 두려움에 얼어붙은 실베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이대로 바위가 되었으면 좋겠다'하고 말을 하고 이 말대로 실베스터는 커다란 바위가 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분홍조약돌은 그냥 조약돌이 아니라 말한 것을 이루어지게 하는 진짜 요술조약돌이었다. 여기까지는 누구라도 한 번쯤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실베스터를 부모님은 온거리를 찾아 헤매고, 바위가 된 실베스터는 "나 여기 있어요. 이 바위가 바로 저예요." 할 수가 없으며 심지어 분홍 요술 조약돌은 바위 근처에 때구르 굴러 떨어져 있다. 나는 이 대목부터가 너무 궁금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나 다시 실베스터가 되고 싶어" 라고 말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바위가 된 실베스터가 이 소원을 빌 수 있게 될지 너무도 궁금하였던 것이다.
오늘은 1학년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께서 그림책을 읽어주셨다. 그림책을 사랑하고 그림책의 가치와 효용을 몸소 체득하고 있는 선생님이 읽어주신 책은 많은 이가 읽어보았고 알 만한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라는 그림책이다. 여기저기서 나, 저 책 읽어봤는데 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나도 그 표지를 모를 리가 없다. 읽었는지, 혹은 읽었음에도 기억하지 못하는지, 어쨌든 오늘은 담임 선생님의 그림책 읽기에 나도 집중했다. 두더지 한 마리가 땅에서 나오는 찰라 누가 머리에 소시지 같은 똥을 누고 간다. 속상하고 화가 난 두더지가 "니가 내 머리에 똥 쌌어?" 하며 만나는 동물마다에게 묻는다. 동물들은 내가 아니야, 내 똥은 이렇게 생겼어, 하며 직접 배설하여 생김새가 다름을 보여준다. 마침내 파리를 만나 범인이 개라는 것을 알고는 콩알만한 자신의 똥을 개의 머리 위에 싸면서 후련하게 복수는 끝난다.
역시 그림책은 누가 읽어주어야 맛이 난다. 나는 오늘 마음이 바쁘지도 않았고 뭔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시시하고 유치 반짝할 것 같은 이야기가 선생님의 목소리를 타고 나오면서 꼬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이야기로 변신했다. 모처럼 나는 이야기에 함빡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이런 행복한 경험을 나중에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살아가는 동안 항상 이 행복한 정서가 아이들의 몸속을 순환하여 볼을 발갛게 물들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