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종착지, 삭발
첫 항암 약을 투여받고 열흘이 지나자 머리카락이 우수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게 되면 보통 머리카락이 전부 빠진 마르고 핏기 없는 사람의 모습을 상기하게 되는데, 아마도 영상 매체에서 늘 암 환자를 그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우리 무의식에 각인이 되는 것 같다.
나 역시 암 진단을 받자마자 떠오른 것이 삭발이 된 내 모습이었는데, 탈모가 시작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머리카락만큼은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다.
‘나는 모근이 튼튼하니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을 수도 있어.’
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첫 항암 약 투여받는 날에 탈모는 피할 수 없다고 종양내과 의사한테도 확인한 사실이지만 실제로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탈모의 양이 많아졌고, 한 주먹씩 잡히는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내가 암 환자라는 현실이 인식되면서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앉았다. 계속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있으니 자꾸 잡념이 떠오르고 심경이 복잡해졌다.
‘어차피 빠질 머리인데, 미련을 두지 말고 밀어버리자.’
‘집착’이 사라지면 마음도 편해지는 법.
비로소 스님들이 왜 절에 들어가기 전에 삭발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불가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 또는 번뇌초라 부른다. 머리카락을 번뇌, 어리석음에 비유하고 이것을 완전히 끊어 버리겠다는 다짐이 스님들의 삭발의식에 있는 것이다. 세속과 번뇌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잘라냄으로써 승려의 신분을 자각하고 계율을 지키고자 상징적으로 머리를 삭발하는 것이다. 스님들은 세속적인 욕망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본분을 되새기기 위해서 삭발한 머리를 만진다고 한다.
나 또한 지금까지 살아온 패턴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로 삭발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나도 환자로 지내는 동안, 지금까지 살아왔던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고 환자의 신분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느라 고생한 내 몸에게 삭발을 ‘휴식의 시간’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얼 그렇게 억척같이 살아왔던지…’
전부 내려놓고, 암 치료에 전념하자는 의미로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삭발식을 거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유명 가발 브랜드 가맹점에 연락을 해 봤더니 가발을 맞춤 제작해야 하고, 제작 시간이 이 삼 주 이상 걸린다고 해서 패스, 가격도 무지막지하게 비쌌다.
‘으아… 머리카락이 없는 설움이 이런 것일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탈모인들의 설움이 느껴졌다. 다행히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를 넣으니 제주에도 가발 전문 미용실이 있었다. 탈모인들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미용실 안은 개별 관리실로 되어 있었다.
우선 나와 일 년 이상 함께 할 분신이 되어줄 예쁜 가발을 먼저 고른 후 삭발식이 거행되었다. 전신 거울 앞에 앉아 갈색 웨이브로 지금까지 내 스타일을 잘 살려주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은 후, 마음속으로 인사를 고했다.
‘그간 나 예쁘게 해 주느라 고생 많았어. 항상 염색하고 파마하느라 하루도 쉬지 않고 너를 괴롭혀서 미안해. 다음에 새로 자라게 되는 머리카락들은 있는 그대로 많이 사랑해 줄게~.’
헤어 디자이너는 이발기로 내 머리를 밀어내기 시작했고, 나는 바닥에 수북하게 쌓이는 머리카락 뭉치들을 보면서 그 간의 삶의 무게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볍고 개운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분들은 막 우시는데, 웃고 계시네요?”
“울긴 왜 울어요? 머리카락 미니까 시원하기만 한데요? 삶의 짐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시원해요!”
“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으시군요. 다른 분들은 여기 와서 보통 대성통곡을 하고 가세요. 그럼 저도 마음이 안 좋은데, 손님은 너무 밝으셔서 저도 마음이 가볍네요. 치료가 잘 될 것 같아요. 기운이 좋으셔서 특별히 가발 빗은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다른 분들한테는 돈 받고 파는 겁니다.”
미용사는 가발 세탁 방법과 관리법 등을 알려주고는 가발에 필요한 빗도 가방에 같이 챙겨서 넣어 주었다. 삭발한 거울 속의 나의 모습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고, 머리카락을 전부 없애고 나니, 나는 내가 굉장한 미인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데, 두상도 계란형으로 동그라니 예뻤고, 인상도 좋아 보였다. 그 간 잘 살아와서 빡빡머리 얼굴도 이렇게 밝고 예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대견했다. 갑자기 이렇게 예쁘게 잘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눈물? 글쎄… 나는 왜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이미 퀴블러 로스가 말한 부정- 분노- 우울- 협상- 수용의 죽음의 5단계를 전부 거쳐와서 그런 것일까? 암이 아니었더라도 부정, 분노, 우울, 협상, 수용의 과정은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전남편과 신뢰가 깨진 이후로 제주도로 내려오게 된 시점부터 시작해 별거 기간 포함해서 5년 이상을 부정하고 분노하고 우울해하면서 지옥 속에 살아 봤더니, 그래 봐야 나한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치르고 얻은 깨달음이라서 그 이후로 찾아오는 불행에 대해서는 매우 담대해졌다. 이혼하기 전까지는 아빠 없이 자라게 될 아이가 너무도 가여워서 마음이 늘 무거웠고, 나에겐 전부였던 가정이 깨진다는 괴로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막상 되돌아보니, 나는 아이가 세 살 때부터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아빠 없이도 혼자서 아이를 훌륭하게 잘 키우고 있었고, 사실 늘 걱정거리였던 아들 같던 전 남편이 사고 치는 모습들을 보지 않으니 한편 홀가분했다.
내가 행복해하면 아이도 덩달아 행복해했고, 내가 괴로워하면 아이도 금방 눈치를 채고 의기소침해졌다. 생각보다 아빠가 있고 없고는 육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저 내 마음이 편안하고, 아이의 니즈를 살피고, 안전하고 사랑받는다는 느낌만 받게 해 주면 아이는 잘 자랐다.
그런 것을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별거하는 동안 혼자서 그렇게 불안해하고, 괴로워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깨달음이 오기까지는 엄청난 시행착오와 시간이 필요했다. 이혼을 하고 나서 보니 이혼이라는 게 괴로워하고 불안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었는데 나는 5년이란 세월을 두려움과 불안에 갇혀 내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스스로 나를 가두어 두었다.
우울함이라는 덫에 갇혀 내 몸과 마음은 또 얼마나 괴롭혔던가? 암세포가 종양이 되려면 최소 8년에서 10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는데, 돌이켜보면 전남편과 별거에 들어가면서부터 쌓아온 불안과 분노의 감정이 내 몸도 상하게 했던 것이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닥쳐도 나는 좋은 음식을 먹었어야 했고, 충분한 잠을 잤어야 했다. 힘들수록 운동도 더 했어야 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을 후회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들이고, 나는 암에 걸렸는데… 아픔을 겪은 이후로 나는 부정, 분노, 우울에 절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배우자가 바람이 나든지 말든지, 집을 나가든지 말든지, 세상이 무너지고 천지가 개벽해도 나는 내 인생, 그리고 엄마로서의 인생을 그냥 살면 됐다. 평화로워야 할 내 가정을 상습적으로 흔들어 놓은 남자를 뭐가 아쉽다고 그리 붙들고 있었는지… 고민에 고민을 더하면서 후회하고 원망하고 반성하고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더 일찍, 제주에 내려오면서 이혼을 하고 왔더라면 차라리 나는 그 수많은 나날들을 고민으로 잠 못 이루며 허덕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민과 괴로움의 시간들이 결국 나에게 병이 되어 돌아왔으니, 누굴 탓하고, 원망할 필요도 없었다. 과감하게 버릴 건 버리고, 나에게 긍정적이고 필요한 것들만 수용하기 시작하니 삶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삭발도 나에게는 아픈 과거를 보듬어 안는 정화의 의식이었다. 인생에 한 번 정도 있을 이벤트였다. 그러나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될 경험이니 한 번만 겪어보자고 다짐했다. 두 번은 이런 일이 없도록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해 주기로 굳게 다짐하며 맨들맨들해 진 머리를 앞뒤로 쓰다듬어 보았다. 인생의 무게가 단박에 가벼워지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