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치의는 나다.
한 번 쓰러지고 나니 정신이 버쩍 들었다.
내 몸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는 병원의 검사 데이터를 신경 써서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8차 항암 전에 만난 서울의 종양 내과 의사에게 7차 항암 기간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서 제주도 응급실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혈액 검사 결과지를 보고는 별다른 이상소견은 없지만 쓰러졌었다고 하니 뇌 MRI는 한 번 찍어보자고 했다.
나는 또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수고가 싫어서 당일 촬영 가능 하겠느냐고 물어보았고, 의사는 나의 처지를 고려하여 당일 검사 접수를 잡아주었다. 원거리 중증환자를 위해 당일 MRI 검사 접수를 해 준다는 사실은 타 병원이나 외국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인데, 내가 다니는 병원은 환자를 배려해 주는 정도가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다.
추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의사는 혹시나 유방암이 뇌로 전이가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방암 환자들 중 항암 치료 도중에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내가 쓰러졌었다고 하니 의사는 뇌 전이의 가능성을 염두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 의사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뇌 전이는 단 1프로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고, 병원이 참 환자 배려를 많이 해 준다며 뇌 MRI를 찍었다.
뇌에 종양이 생겼을 리는 없고 뇌혈관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의식을 잃었고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니 지금부터 철저하게 내 몸은 내가 살피기로 결심했다.
의사는 내 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내 주치의와 종양외과 의사에게 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치료에 임하고 있지만, 그들이 내 몸속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의 원인과 결과를 늘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철저히 나만 믿기로 했다.
나 스스로만 나에게 일어나는 부작용, 내가 먹고 있는 음식, 내 스트레스 환경, 심리적 변화 등을 정확히 매 순간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매일 적어 내려가기로 했다. 이미 7차례 항암 치료는 지나갔고, 앞으로 1회의 선 항암만 남아 있기 때문에,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수술 후에도 항암치료를 더 받게 될 확률이 있으므로 지금부터 내 몸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꼼꼼히 확인하고 적어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10. 내 몸의 주치의는 나다.
11. 내 몸의 상태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선 항암의 마지막 치료인 8차 화학약물을 투약받은 후, 지금까지의 나의 의무기록 사본 증명서를 떼어 백혈구 수치 변화를 한눈에 보기 좋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백혈구 수치가 항암 중에는 가장 예민하게 지켜봐야 할 부분이므로 백혈구 수치를 진단 시점부터 항암 차수 날짜 별로 적어서 비교 분석해 보았다. 백혈구는 1mL(마이크로 리터) 당 4000개~1만 800개 까지를 정상 수치로 본다.
진단받았을 당시 6천 개가 넘었던 백혈구 수치는 항암과 더불어 처음엔 2천9백 개 정도로 떨어졌고 가장 낮았을 때는 2천3백 개가 조금 못 되어서 항암을 지속하지 못하고 백혈구 수치를 늘려주는 주사액을 맞았던 때이다.
내가 쓰러진 시점의 백혈구 수치는 7천200개 수준으로 항암을 시작하기 전보다 되려 더 높았는데, 당시 어떤 감염이 생겨서 백혈구 수치가 일시적으로 높아졌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 보았다.
적혈구 수치는 진단받았을 당시 4천 백 개 정도였는데, 항암 중에도 3천 칠백 개에서 팔 백 개 정도로 항암 회 차마다 큰 변화는 없었다.
백혈구 수치만 크게 오른 것을 보면 몸속의 염증이나 감염이 쓰러진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고열 증상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심장에서 뿜어낸 혈액이 머리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머리가 팽그르르 돌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부터 혈압을 신경 써서 측정하게 되었는데, 나는 내가 상당히 저혈압이라는 사실도 암 치료 중에 자각했다. 평소 혈압이 낮은 편 이긴 했지만, 항암 치료로 인해 모든 세포들이 공격을 당해서 그런 건지 평소보다 혈압이 더 낮아졌다.
혈압이 낮으면 혈액이 순환하지 못하고 결국엔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 그 단순한 진리를 건강할 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건강한 사람들은 내가 조만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 역시 건강할 땐 그랬다. 혈압은 어렸을 때부터 좀 낮은 편이었는데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고혈압이 문제가 되지, 저혈압은 약도 안 쓴다.
그러나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엔 혈압이 낮아지면 중대한 상황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 기절 사건을 통해 깨달았다. 저혈압이 내 몸을 암이 생기는 환경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혈압을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혈압이 떨어지게 되는 원인을 찾아보니 스트레스, 혈액량 감소, 심한 탈수, 약물 복용, 심각한 질환 등이 원인이었다.
너무도 명백하게 급격한 혈압 저하로 내가 쓰러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항암 중 부작용으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고, 화학 약물치료로 인해 혈액량도 감소했으며, 6개월의 긴 치료 기간 동안 탈수 현상도 당연히 겪고 있었다. 화학 약물 치료로 인한 혈압 저하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사도 나에게 사전에 알려 주지 않았고, 내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조차 원인을 모르겠다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의식이 돌아와서 망정이지 나는 사실 그날 다른 세상에 한 발짝 발을 들여놓았다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 약물 치료로 인한 혈압의 저하가 나를 쓰러트린 원인이었던 것이다. 의사들은 오직 백혈구 수치의 감소로 인한 염증과 감염으로 고열이 나는 경우만이 암 환자의 응급상황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혈압이 낮아진 내 경우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으니 내가 왜 쓰러졌는지 의사들도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화약 약물 치료로 혈압이 급속히 저하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화학 약물 치료 중에 급속한 혈압의 저하로 인해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 항암 치료의 가장 큰 부작용이라고는 그 어떤 의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다녀온 이후에야 내가 항암 치료 중에 사망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항암 치료로 아주 급작스럽고 준비 없이 삶을 마감하게 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항암치료라는 이름 하에 독성 화학 약물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치료를 받게 되는 것이다. 살겠다고 받는 항암 치료가 역으로 환자를 죽일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현실 속에서도 암 환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암이 독성이 강한 화학 약물로도 잘 사멸이 안 될 정도로 강력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번식하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드는 게 항암 치료인 것이다.
기왕 이렇게 7차까지 온 거, 잠깐 의식을 잃고 저 세상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살아 돌아왔으니, 남은 1차례의 항암만 끝내면 수술을 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남아있는 종양의 크기가 줄어들 거라는 기대로 8차 항암치료까지 기어코 마쳤다.
그러나 선 항암이 모두 끝나고 난 후의 백혈구 수치는 1천 구백여 개 정도로 감염에 매우 취약한 만신창이 상태의 몸이 되었고, 만약 그 사이 코로나나 다른 바이러스에 전염됐으면 백혈구 수치 부족으로 생존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 사이 코로나 감염이나 다른 감염에 노출되지 않았고, 지금껏 그래왔듯 선 항암 치료가 모두 끝날 때까지 행운의 수호신은 내 곁에 머물러 주었다. 나는 그 해 죽지 않을 운명임에 틀림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총 8회 선 항암 중 두 번째 약물 도세탁셀은 3달에 걸쳐 4차례나 투약되었으나, 내 유방에 남아 있는 암 덩어리한테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 한 채, 나의 말초세포와 점막 및 피부세포를 초토화시켜버리고 끝내 손톱 발톱까지 내 몸에서 앗아갔다.
종양의 크기는 처음 4차 약물 치료 후 1센티나 줄어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두 번째 약물은 온갖 부작용에 위급한 상황까지 안겨주었으나 종양의 크기는 줄여주지 못했다.
8번의 선 항암 후 최종 종양의 크기는 1.6Cm로 처음 발견됐을 때 2.6Cm였던 것을 감안하면 기적처럼 1Cm나 관해 되었지만, 8번의 항암 투약 중 4번의 약물 투여만으로 얻었던 결과이다. 괜히 4번 더 해서 종양의 관해는 없이 부작용으로 고생만 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두 번째 약은 4회를 굳이 전부 맞았어야 했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항암 약은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2회 투약 후 초음파 검사라도 해서 종양 크기가 줄지 않으면 거기서 항암을 중단하는 게 원칙이어야 한다. 까딱하다가는 멀쩡한 세포도 전부 사멸시키고 산 사람도 송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원은 수많은 환자들에게 세세하게 중간 검사를 해 줄 수가 없다. 나는 수술 전 회진을 온 주치의에게 첫 번째 약물은 1센티미터나 종양이 작아졌고, 두 번째 약물은 종양 사이즈에 거의 변화가 없었는데, 왜 첫 번째 약물로 계속 치료하지 않았는가와 두 번째 약물은 효과가 없었는데 왜 4차례나 투약을 받았어야 하는가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약이 누적돼서 그런지, 내 몸에 맞질 않아 그랬는지, 두 번째 약물의 부작용은 첫 번째 약물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손톱, 발톱이 전부 빠졌을 정도이니 말이다. 의사는 규정이 그러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표준치료의 정해진 룰대로 약이 듣든 안 듣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유방암 환자들은 8차례에 걸친 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처럼 운이 좋아 첫 번째 약으로 종양의 관해가 일어나면 다행이지만, 어떤 환자들은 표준치료 중에도 전이가 일어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런 경우에는 항암치료를 멈추고 주치의가 바로 수술로 종양을 제거한다.
내 경우에도 첫 번째 항암 약 4회 투약 이후, 2번째 항암 약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빨리 알 수 있었더라면 그 무지막지한 부작용을 전부 경험하지 않고 바로 수술을 했을 것이다. 주치의는 처음부터 선 항암 없이 수술을 하려고 했지만 전의 가능성으로 인해 선 항암요법으로 치료 방법이 바뀐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종양크기를 줄이지 못 한 항암 약 마저 몸속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세 암세포를 사멸시키는데 일조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떤 항암제는 종양을 관해 시키기도 하고, 어떤 항암제는 멀쩡한 세포들만 손상시키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 세포독성 항암 약품들은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동시에 발암물질이기도 하다는 것을 항암 치료가 다 끝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노트를 꺼내 지침 사항들을 몇 가지 더 적어 놓았다.
12. 항암 치료의 결과가 완전 관해가 아니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13. 부정적인 생각은 치료를 방해한다. 항암 치료 중 나쁜 상황이 생겨도 끝까지 긍정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항암 치료로 종양의 크기가 줄지 않았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잔존 미세 암세포를 사멸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14. 항암제의 부작용이 너무 심한 경우엔 주치의와 중간 검사가 가능한지 상의하여 종양의 관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항암 약 투여는 과감하게 그만두는 게 좋다. 정상세포가 사멸되고 백혈구 수치가 줄어들면 다른 치료를 이겨낼 면역이 남아나질 않게 되기 때문이다.
15. 세포 독성 항암 약물은 치료제인 동시에 발암물질이기도 하다. 치료 시엔 어쩔 수 없이 독소를 몸속에 투약받지만, 치료가 전부 끝나면 몸속의 독소를 해독하고 건강한 세포가 자라나도록 돕는 것이 환자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