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한다.
뇌를 망치로 두드려 맞은 듯이 정신이 없었다. 40여 년 살아오면서 큰 일 앞에서도 태연하게 잘 버텨왔던 나인데, 암이라는 한 마디 짧은 단어 앞에서는 태연하기가 어려웠다.
교육 일을 하던 나의 뇌는 늘 쉴 새 없이 강의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는데, 암을 선고받은 그날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몸속에 흐르던 전기가 번개를 맞고 차단된 것 마냥 머리 속도 까맣게 타버렸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이가 있었다. 세 살 때부터 혼자 키운 아이, 내 전부인 딸아이가 있었다.
‘아… 애는 누구한테 맡겨야 하나…’
죽음 앞에서도 나는 오직 아이만 생각하고 있었다. 암에 걸렸으니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 없이 자랄 아이가 걱정이 되었다.
머릿속에서는 부모님부터 시작해 오빠 내외, 절친들까지 아이의 보호자로 적합한 인물을 수색해 보았지만, 부모님은 너무 연로하셨고, 오빠 내외는 새벽부터 장사하는 사람들이라 애한테 신경을 전혀 못 써줄 처지였다. 친구들? 아무리 삼십 년 지기 친구들이라고 해도, 남의 자식을 키워주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아이를 맡기기에 가장 덜 미안한 사람은 아이의 아빠였지만 이미 다른 가정을 꾸린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길이 막막했다. 다른 여자 좋다고 나와 아이를 떠난 사람에게 다시 아이를 맡긴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연락을 끊고 산지가 어언 5년이 다 되어갔다. 잊고 살았는데, 또다시 그 사람 생각을 떠올리다니 갑자기 속이 체한 듯 불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죽으면 애야 어떻게든 살아야 가겠지만 아직 혼자서 세상을 배우기엔 열 살 밖에 안 된 핏덩이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살아야 했다. 애를 누구한테 맡길 생각은 집어치우고, 내가 살아서 지켜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이혼서류에도 도장을 찍었다. 처자식 떠난 사람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기로 이 악물고 결심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아이 옆에서 학위도 따고, 사업체도 꾸리고 교수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야 엄마 손 좀 덜 타는 열 살이 되었는데, 행복은 지금부터 시작이어야 하는데….
‘암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딱하게도 나는 병에 걸렸다고 슬퍼하거나 누굴 원망할 처지도 되지 못됐다.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벳 퀴블러-로스는 심리적 고통을 애도(Grief) 하기 위해서는 5가지의 특징적인 단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그런데 삶이 늘 긴박하게 돌아간 탓이었는지, 하나 해결하고 나면 금방 또 다른 인생의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님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배워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의 과정은 그냥 늘 패스였다.
나는 인생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저 빨리 수용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데 집중했다. 부정하고 분노할 시간이 없었다. 삶은 늘 그렇게 나에게 정신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방암 선고는 나에게 그저 또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만 하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물론 이제껏 경험해 왔던 문제들과는 차원이 다른,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살아야 했다.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 단 한 사람뿐이었다.
흐트러진 정신을 부여잡고,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한 가지씩 적어 내려갔다. 나에게 유방암 진단을 내려준 여 의사도 작전을 잘 짜야한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1. 나를 안전하게 수술해서 살려 낼 수 있는 실력 있는 수술 집도의를 찾아서 병원을 예약한다.
2. 지금 나의 불안을 달래 줄 수 있는 사람, 암을 경험했지만 생존해 있는 인맥을 찾아서 암에 대처하는 자세를 배운다.
3. 가족과 지인들에게 알린다.
4. 혹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경우에 대비한다.
4번 문항까지 적고 나니 생각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는 않았다. 아이 걱정에 4번째 문항 앞에선 해결책이 재빠르게 나오질 않아 답답했지만 일단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50%라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50%이니, 생존율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치료를 받는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4번 체크리스트는 추후에 고민하기로 했다.
1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봤다. 유방암 명의라고 검색어를 넣어보니 정말 세세하게 의사 이름들이 찾아졌다. 생각보다 유방암 명의가 많았는데, 도무지 그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명의라고 해도 수술 경험이 많을 뿐이지, 나를 살릴 수 있는 의사가 누군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환자들의 후기를 들여다보면 그나마 의사의 성향이 파악될까 싶어 한 참을 댓글들을 읽어 내려갔지만, 그 또한 주관적인 평가들이라 나랑 맞는 의사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이렇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결국, 선택은 인간의 몫인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나는 집이 제주도라서 병원까지 다니기에 너무 멀거나 번거롭지 않아야 했다. 지난번 췌장암인 줄 알고 찾아갔던 강남에 있는 병원은 공항에서 너무 멀기도 했고 지하철로 다니기에도 어려움이 있어서 일단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그 외 제주도에서 가기에 교통편이 난해한 곳은 모두 제외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 빅 5 병원 중에 공항에서 가장 가깝고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 곳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병원을 결정하고 나니 많은 고민들이 한 번에 해결되었다. 당시 신촌 세브란스에 근무하는 유방외과 의사 리스트를 찾아보니 온라인에 명의라고 이름이 소개될 정도로 수술을 많이 한 의사는 없었지만, 꽤 많은 수술 집도의들이 편재해 있었다.
일단 전화기를 들고 신촌 세브란스에 예약 전화를 넣었다.
“아.. 조직검사 결과 상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다고요?”
“네.. 그럼 오늘 부로 산정특례 명단에 오르시게 됩니다. 의사는 어떤 선생님으로 하시겠어요?”
역시 서울 종합병원의 상담사는 친절함의 수준이 제주도와 달랐다. 암 진단 받은 환자의 마음을 공감이라도 해 주듯 나에게 연민의 말투로 응대했다.
“아… 선생님 중에 제일 수술이 빠른 분으로요.”
“모든 선생님들이 지금 당장은 수술이 어려우세요. 저희가 수술 선생님을 배정해 줄 수 없게 되어 있어서 환자분이 의사 선생님 결정한 후에 예약해 주셔야 합니다.”
수술 집도의 결정 후 다시 예약하겠다고 말하고 일단은 전화를 끊었다. 온라인상 신촌 세브란스 유방외과에 들어가 집도의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젠장 이 중에서 어떻게 선택하라는 말이야? 얼굴만 봐선 알 길이 있나… 무슨 제비 뽑기도 아니고. 내 목숨을 맡길 의사인데…’
AI가 절대로 인간을 대체해 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가 의사결정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길로 가느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해야 할 몫이다. 대여섯 명 되어 보이는 의사들의 프로필 만으로는 도대체 누구한테 내 목숨을 맡길지 결정이 불가능했다.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열차의 마지막 티켓을 뽑는 것 같은 심정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 친구분 중에 유방암 수술을 받은 분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팝콘처럼 튀어나왔다. 아주머니는 원래 서울 분이셨는데, 제주에 정착하려고 내려오셨다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서울로 가서 수술 및 치료를 마치신 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이모, 이모 하면서 따랐던 분이라 내 전화기에도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전화를 걸어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고 하니 아주 신속하게 본인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를 추천해 주셨고, 아예 예약까지 도와주겠다는 것을 내가 직접 예약하겠다고 고사했다. 유방암 수술 후 현재 생존 5년 차인 아주머니는 아직도 병원에 6개월에 한 번씩 다니신다고 했다. 수술하신 지 5년이 넘었는데 재발 전이 없이 잘 지내고 계신 것을 보니 나도 확신이 들었다.
‘암에 걸렸다고 다 죽지는 않는구나…’
‘나도 살 수 있겠구나… ‘
작은 희망의 끈이 보였다.
의사를 찾는 일도 문제였지만, 유방암 치료에 대한 정보도 필요했기에, 치료 과정에 대한 질문들도 빼먹지 않고 물어보았다. 무엇보다 항암이 매우 힘드셨다던 아주머니는 항암 중에 고열로 응급실에 몇 차례 실려가시고, 중환자실에 며칠씩 입원해 계셨다고도 했다. 항암이 장난이 아니긴 한 것 같았다. 실제로 항암 중에 사망하는 암 환자들도 다수이니 치료가 만만히 볼 대상은 아닌 것이다.
아주머니의 추천 대로 나는 의사를 결정해서 예약을 넣었고, 조직검사를 통해 암 진단을 받고 나니 예약 시점부터 산정 특례자로 등록이 되었고, 검사 일정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의 선진적인 의료 시스템을 몸소 체험하고 나니,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