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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끌치유 Sep 05. 2023

불안을 잠재우는 법

To do list

To do list의 1번이었던 수술 집도의를 찾아서 병원 예약하기를 마치고 나니 검사일 까지는 약 일주일이 남았는데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구라도 붙들고 불안해서 미칠 것만 같다고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멀쩡하게 건강한 사람들이 암 진단받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줄 리가 만무했다.


나의 병기는 도대체 얼마나 진행된 건지, 살 수 있는 날은 과연 얼마나 남아있는 것인지, 항암치료는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유방암치료는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머리가 온통 죽음과 관련된 막연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숨을 쉬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인터넷을 뒤적거려 보아도 온통 부정적인 내용들만 눈에 들어오고, 두려움으로 꽉 차버린 머리는 내 사지에도 영향력을 미쳐 몸도 뻣뻣하게 굳어오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가장 한심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갇혀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지금 딱 그 꼴이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잘 해결해 왔던 나인데, 죽음의 문 턱 앞에서는 나 역시 그저 한없이 나약한 미물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에 갇혀 아무것도 안 하고 두 손 두 발 놓고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가 있고, 살아야 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 내가 마흔을 넘어선 나이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심호흡을 했고, 집중해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들만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40여 년도 그리 녹록하지 않았지만 어려움 앞에서 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고, 살면서 마주쳤던 절망스럽고 예측 불허한 위기의 사건들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이기에 그나마 암 앞에서 조금은 덜 당황할 수 있었고, 치열하게 살아온 40년이란 세월이 있었기에 죽음을 덤덤히 바라볼 수도 있었다.


아이가 걱정됐고, 어머니가 놀라실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였지만 다행히 당장 죽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살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적은 늘 내 삶의 언저리에 함께하고 있었으므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온 정신을 집중해 To do list의 두 번째인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 가족들이나 가까운 지인들에게 알리면 불안과 걱정이 훨씬 더 커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우선은 내가 안정을 찾아야 했고, 내 마음이 단단해져야 했다. 개인적으로 눈물 콧물 흘리며 보는 드라마도 딱 질색이다. 하물며 나로 인해 주변인들이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건, 성격상 더욱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암 진단은 나도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사건이었기에 좀처럼 두려움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만히 앉아서 떨리는 전신을 호흡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방법을 모색하던 중 문득 지인 중에 암 진단 후 생존해 계시는 분이 떠올랐다. 그분도 외관상으론 아주 건강해 보이고 활력 있어 보이는데 지난번 모임에서 암 환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놀랐다. 평소 연락하며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서 전화하기가 잠시 망설여졌지만 죽음 앞에서 체면이며 예의며 따질 일도 없었기에 과감하게 전화를 해서 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아, 그래요? 병기는 몇 긴데요?”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온 게 아니라서 확실하지는 않은데 사진 상에서는 2기 정도로 보여요.”

“에이, 그럼 걱정하지 말아요. 괜찮아요. 난 대장암 3기였는데 간으로 전이 돼서 얼마 전에 또 수술했는데요 뭘. 나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잖아! 유방암 2기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 가서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그제야 호흡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숨이 쉬어지는 듯했다.


“대표님은 언제 진단받으셨어요?”

“나는 4년 전에 대장암 3기 수술해서 대장 거의 다 잘라냈는데, 얼마 전에 간으로 전이돼서 또 수술했어요. 근데 지금도 괜찮아요.”


4기 암 환자라고 하기엔 너무 덤덤하고 편안해서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유방암에 걸려서 죽는 줄만 알고, 죽을 경우의 To do list까지 작성한 후 변호사며 유언장이며 별 걸 다 생각해 놓았는데 매우 오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까봐 불안해서 잠도 못 자고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속을 끓인 요 며칠 만에 몸도 마음도 십 년은 늙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전화 한 통으로 십 년의 체증이 쏴악 씻겨 내려가는 듯 불안을 잠식시킬 수 있었다.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나와 같은 처지를 경험한 적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조언과 위로가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얼른 주변에 유방암 치료를 마친 후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나는 아직 유방암에 걸리기에 조금은 젊은 40대 초반이었기에 가까운 지인 들 중에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아직 없었다.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수소문하면 괜히 걱정만 끼칠 듯하여 단골로 다니는 네일 숍 주인 언니에게 아무렇지 않게 혹시 손님 중에 유방암 환자는 없느냐고 대뜸 물어보았다.


제주도의 중심 상권에서 오랜 기간 네일 숍을 운영해 왔으니 별의별 고객들이 다 있지 않을까 싶어 던진 말에 주인 언니는 얼른 단골손님 중에 얼마 전까지 유방암 치료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알려줬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흔쾌히 전화통화를 허락해 준 유방암 환우 분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내가 이래저래 해서 유방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고 얘기하니 너무도 친절하게 본인의 치료과정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해 주셨다. 본인은 림프에서도 암세포를 몇 개 떼 낸 유방암 3기 환자라고 했고, 치료받은 병원에서부터 담당의사, 치료 기간, 치료 과정까지 내가 묻는 질문에 하나도 소홀하지 않게 세세히 답변해 주셨다.


특히 궁금했던 건 가장 두려운 항암치료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항암 부작용에 대해서도 너무 적나라하게 설명해 주셔서 무서웠지만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일이든 알고 시작하는 것과 모르고 시작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전체 치료 기간은 정확히 1년 6개월이 걸렸고, 항암은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구토도 심해서 잘 먹지 못했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항암의 횟수가 진행될수록 발바닥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손톱 발톱이 다 빠지고 본인은 항암 치료 중에 응급실에도 여러 번 실려갔었다고 했다. 지금은 치료가 모두 종료되어 살 것 같다고 했고, 죽을 것 같이 힘들었지만 죽지는 않더라고 얘기해 주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지속된 일면식도 없는 환우 분과의 통화로 내가 앞으로 받게 될 항암 부작용에 대해 정확하고도 디테일 한 정보를 얻게 되었고, 충격적인 내용들이었지만 앞으로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게 될 거라 받아들이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 비로소 To do list의 네 번째인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나의 유방암진단에 대해 알렸고, 놀라서 당황하던 지인들도 내가 덤덤하게 괜찮다고 하니 되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가족들에게 알리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는데, 처음 진단을 내려준 여의사도 암은 처음부터 작전을 잘 세워서 가족들과 함께 대비해야 이겨낼 수 있다고 했으므로 어머니께 조심스레 암 진단에 대해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늘 내 인생에 나침반이 되어주셨던 어머니는 침착하고 굳건하게 나의 투병 동지가 되어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작전은 세워졌고, 전장으로 돌진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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