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겔다 Mar 25. 2024

9. 나의 시월드

언젠가 난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결혼을 마음먹은 이유는 당신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부모님이 좋아서이기도 해"라고.


어머님 아버님은 참으로 다정하신 분들이다. 

자식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게 느껴지는 부모님.

각자의 삶의 무게를 힘들어하며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부모님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남편과 난 같은 회사를 다녔었고 비밀연애를 했었다. 

남편도 대학원생 나도 대학원생, 우린 계약직 연구원으로 같은 곳에서 근무했었다. 

같은 부서이지만 남편과 내 자리는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내 자리 뒤엔 부서 공용물품 캐비닛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업무 준비를 하고 있으면 남편이 슬그머니 와서 캐비닛에 물건을 꺼내는척하며 내 자리에 주스병을 올려두고 갔다. 

어머님께서 준비해 주신 주스였다. 사과와 당근으로 집에서 직접 만드신 주스. 

주스를 마시고 어머님께 감사하다는 메모를 빈주스병에 붙여서 보내드리곤 했었는데 

아들만 키워본 어머님은 그 작은 쪽지에도 기뻐하셨다고 한다.  

나 역시 엄마가 도시락이나 간식을 챙겨준 일은 없었기에 그런 챙김이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행복했었다.  


시월드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고부가 잘 지내는 경우는 드문 현실이지만 

난 시어머니가 너무 좋고 존경하고 사랑한다. 

나도 저런 모습의 엄마가 되어야지 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인 모습이다. 

아들집에 와서 냉장고 문을 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시고

그 어떤 집안행사도 강요한 적이 없다. 제사든 김장이든 어르신들 생신이든 내가 사정이 있거나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적극적으로 못 오게 말리셨다. 

아들 생일은 기억하지 못하셔도 며느리 생일은 꼬박꼬박 기억해 '생일축하한다 사랑한다'는 문자와 함께 용돈도 챙겨주신다. 

말도 항상 예쁘게 해 주시고 무슨 일이든 칭찬부터 먼저 하신다. 

갈등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시다. 


아버님은 자식들한테는 무뚝뚝하고 엄하셨다고 들었지만 나한테는 한없이 너그럽고 온화하신 분이다. 

큰 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으로 힘들어할 때였다. 

시댁에서 저녁을 먹고 티브이 보며 쉬고 있는데 아버님이 안방으로 손짓하며 부르셔서 들어가 보니  

하얀 봉투를 나에게 내미셨다. 어머님이랑 남편 모르게 살짝 용돈을 쥐어주시면서 

먹고 싶은 거 망설이지 말고 사 먹으라 하셨다. 

입덧으로 고생하는 며느리가 안쓰러우셨던 것이다. 


정년퇴직한 아버님은 시골에 가서 할머님이랑 같이 지내시고 계신다.

봄철이 되면 온갖 나물을 채취해서 보내주시는데 

언제나 잊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우엉잎을 챙겨 보내주신다. 

내가 맛있다고 한 게 있으면 그다음부터는 잊지 않고 꼭 챙겨서 보내주신다. 

언제나 부족함 없는 완벽한 며느리라 칭찬해 주시고 고맙다 해주시는 분이다. 


시할머님도 계신다. 

내 나이 벌써 50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할머님 앞에선 어리광을 부릴 수 있다. 

할머님은 손주며느리인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해 주신다. 

귀엽다며 볼도 쓰다듬어 주시고, "난 네가 제일 좋다"라는 표현도 자주 해주신다. 

아버님 형제가 많아서 할머니 손자, 손녀, 손주며느리, 손주사위 등 자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나를 이뻐해 주신다. 

시골에 가면 남들 눈을 피해 내 손을 이끌고 찬장으로 가서 까만 봉지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주시며 얼른 가방에 넣으라고 하신다. 네가 젤로 이뻐서 너만 주는 거니 얼른 가방에 넣으라고.

볶은 깨, 손수 껍질을 벗겨낸 알밤, 고춧가루, 땅콩 등등 

나만을 위한 할머님의 선물들이 무척이나 정겹고 무척이나 감동스럽다. 


이혼을 생각하면 아이들만큼이나 이 분들이 맘에 걸린다. 

내가 좋아하는 분들에게 상처를 드리는 것이니

그분들에게 이혼 소식을 알려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혼이 남편과 나 둘만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만들어온 많은 인연들과의 관계도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다. 

둘만의 이별이 아니다.

여러 사람과의 이별이다. 

그래서 힘겹다.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든다. 

나의 결정이 나의 이기심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일수도 있음에 

여전히 복잡한 마음이다. 

과연 나는 옳은 결정을 한 것일까?

이전 08화 8. 아이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