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 중 참으로 많은 시간들이 냉전기였다.
남편이 만취해서 집에 들어온 다음날은 어김없이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내 생일이나, 기념일을 까먹은 날도 서운한 마음이 들어 입을 닫았었다.
친구네 가족들과의 여행에서 남편은 친구들과 즐기느라 어린 아이들을 나 혼자 챙기고 있었을 때도 난 서운한 마음이 들어 삐쳤었다.
그렇게 내가 삐쳐 있으면 남편은 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눈치도 보고 괜히 장난도 치고 미안하다 사과도 하고 내가 풀어질 때까지 나를 다독였다.
그럼 난 못 이기는 척 기분 풀고 다시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곤 한다.
늘 똑같은 패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는 조금 다른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분위기가 냉랭해졌음에도 남편은 사과도 변명도 없다.
하루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바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적인 대화를 시도한다.
그럼 그런 모습에 난 더 화가 났다.
그렇지만 아이들 때문에라도 둘이 말을 안하고 지낼 수 없는 현실이기에 무뚝뚝하고 간결한 대화가 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맘이 풀려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문제는, 남편은 그 순간이 지나면 그때의 잘못도 지나가고 나의 마음도 다 풀어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서운하고 화났던 그 순간들을 차곡차곡 내 맘속에 쌓아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음에 또다시 대립되는 순간이 오면 난 지난번 일까지 덧붙여 서운한 감정을 이야기하는데
남편은 지난 얘길 왜 꺼내냐고 되려 화를 낸다.
해결되지 못한 감정의 실타래가 계속해서 내 맘속에 엉켜져 있는 기분이 드는데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남편이 대화를 피한다는 점이다.
남편의 사과는 언제나 변명이 수반된다. 그래서 변명 대신 진실만 얘기하고 사과를 하라고 하면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한다. 다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거창하게 풀어낸다.
그런 변명들이 듣기 싫어 화를 내면 남편은 입을 닫아버린다.
그런 순간들이 몇 번 반복되다 최근엔 내가 토라져있어도 변명조차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과를 하고 마음 상했던 그 순간을 풀고 지나가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냉전의 해결책이 시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편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시간이 지나서 내 마음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난 싸우더라도 대화가 필요한데 남편은 싸우기 싫어 침묵을 택한 듯하다.
싸우고 불편한 감정은 나도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침묵이 해결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대화를 해야 한다.
최근 이혼서류를 넘겨준 후 아무런 액션이 없어서 긴 침묵 끝에 문자를 보냈다.
"우리가 왜 이혼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라고..
남편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번 더 대화할 기회를 너한테 요청하는 건데 답이 없구나"라고 하니 남편의 답에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
"난 대화 하자는 의미인 줄 몰랐어. 싸우자는 의미인 줄 알았어"
지금껏 남편은 나의 대화 요청을 싸우자는 의미로 받아들였나 보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내가 싸움을 걸 이유가 뭐가 있으랴.
난 대화를 통한 해결을 바래왔을 뿐이다.
졸지에 싸움닭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우린 대화가 필요했다.
그냥 시간이 약인듯한 해결은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어느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가 떠오른다.
'해결되지 못한 과거는 반드시 찾아온다. 그게 원한이든, 사랑이든'
남편이 싸우기 싫어 해결하지 않고 흘러 보낸 수많은 오해들이 결국엔 지금 다시 우리 둘 앞에 슬며시 찾아온 것 같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서로 엉켜 거대한 모습으로..
정말 이번엔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난 싸우자는 게 아니라 대화하자는 거였다.
우리에겐 침묵의 시간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