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오름에서 노루를 마주쳤다
제주도로 여행을 온 사람이라면 결심하는 게 있을 것이다. 바로 '오름'에 오르기. (아재개그 아닙니다) 나 역시도 한 달 살기를 계획하면서 유명한 오름을 열심히 올라 체력을 키우고 말겠다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닥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내가 <뚜벅이>라는 사실이었다.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과 도보로만 다니는 사람을 '뚜벅이'라고 한다. 뚜벅뚜벅 열심히 걸어가면 주유비도 아끼고, 렌트비도 아끼고, 환경도 지키고 얼마나 좋냐! 고 말하고 싶지만... 제주도에서 차 없이 여행이란 꽤나 쉽지가 않다. 오지 않는 버스를 망연자실하게 기다리면서 겨울바람에 오들오들 떨던 나날이란. 그래도 관광지로만 가면 얼추 편하다. 문제는 저 중산간 지역에 있는 오름들이다.
새별오름, 금오름, 아부오름, 용눈이오름. 유명한 오름을 카카오맵으로 버스편을 검색하면 곧 좌절에 빠지고 만다. 오름 버스정류장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환승해야 할 버스가 많다. 환승 버스는 악명 높은 초록색 버스라서 하루에 몇 대씩밖에 오지 않아 시간을 잘 맞춰야한다. 갈 때 택시를 타더라도 내려올 때가 문제다. 뚜벅이로 오름을 간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오름에서 택시가 오지 않아서 여기서 밤을 샐 뻔했다", "한 시간을 기다려서 겨우 택시가 잡혔다.", "히치하이킹을 할 각오로 가야한다."라는 글들이 차고 넘친다. 관광지에서 벗어난 지역이니 택시도 잘 오지 않는 거다.
아니 그러면 뚜벅이는 어떻게 오르라는 건데!!! (격한 분노)
그러다가 한 줄기 빛처럼 발견한 오름이 하나 있다. 제주도 동쪽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겐 거의 반려 버스와 같은 존재인 201번. 그 201번이 오가는 '한지교차로'에서 내리면 매오름이 바로 코앞이다. 오늘은 뚜벅이도 쉽게 갈 수 있는 매오름 탐방기를 써보려고 한다.
분명 매오름을 검색했을 때 '걷기 쉬운 오름 추천'이라고 쓰여있었다. 마침 보슬비도 내릴 거 같은 날씨겠다, 너무 가파르면 무서울 것도 같아서 이곳을 가리고 했다. 그렇게 훗날, 블로그에 '걷기 쉬운 오름'이라면서 날 속인 블로거를 원망하게 되는데....
201번에서 내려 앞으로 좀만 더 가면 매오름 지도와 함께 좁은 입구가 보인다. 유명하지 않은 오름이라서 입구는 다소 초라하지만, 그만큼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무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오름을 오르며, 마스크 너머로 들어오는 피톤치드를 맡고서 흥겹게 평지를 걸었다. 하지만 그 흥겨움도 잠시, 자연스럽게 경사가 심해지면서 어느덧 막막한 오르막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렸다. 도저히 코로는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입으로 끊임없이 후, 하, 후, 하 숨을 내뱉자 목구멍이 건조해져서 갈라지는 거였다. 피톤치트가 이토록 매운 공기였나. 입천장과 목구멍이 따가워졌다. 몸속에 산소도, 피도 안 도는 망할 몸뚱이를 겨우 이끌고 오르막을 오르며 생각했다. 이번 생에 내 몸은 망했을지도.
자연 속을 걸으면 생각정리가 될 줄 알았다. 여유롭게 내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를 생각하면서 걷게 될 거 같았는데, 정작 오름에 오르니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힘들어서 앞으로 걸어가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한 발자국 내딛는 걸음만 생각하다보니 머릿속이 텅 비면서 개운해졌다. 생각을 하지 않는 시간 역시도 필요한 거였다.
나는 잡생각이 참 많은 사람이다. 나에게 '멍 때린다'의 의미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딴생각을 한다'는 의미에 더 가까웠다. 가만히만 있어도 별 생각들이 들었고, 노래를 들으면 더 노래와 관련된 생각들이 들어서 우울한 노래를 듣는 게 힘든 사람이다. 숙소에 혼자서 가만히 있을 때마다 별별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대체적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끌어올려지기 마련이었으니.
'걷기 명상'이란 게 있다고 한다. 걸으면서 풍경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활동이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장소에 집중을 하는 수련법인 듯하다. 내가 아는 명상은 가만히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밖에 없었는데. 그런 건 워낙에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게 되더라. 하지만 이렇게 걷기를 통해 명상을 한다면, 나도 좀 더 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오름을 오르다가 이제 정상에 올라가는 길목에서 노루와 마주쳤다. 무언가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노루한 마리가 휙 하고 나타난 거였다.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노루 한 마리는 나를 보지도 않고 반때쪽 풀숲으로 휙 사라졌다. 그런데 또 한 마리의 노루가 나타나더니, 걔는 바로 가지 않고 나와 눈을 마주치는 거였다.
다행히 나랑은 몇미터 정도의 거리로 떨어져 있어서 도망가기엔 충분했지만, 노루가 나타난 순간 머릿속에서 별별 생각이 들었다. 만약 쟤가 나한테 달려들면 죽지 않을까? 옆으로 도망쳐야 하나, 죽은 척을 해야하나, 소리를 질러야 하나. 오히려 도망치면 쫓아오지 않을까. 내 상상 속에서 노루는 곰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는 몇 초간 눈싸움을 했는데 그 시간이 나에겐 마치 30분처럼 느껴졌다. 누가 먼저 눈을 내리까는지에 대해 서로의 자존심을 건 대결은 했지만, 결과는 나의 참패였다. 내가 노루를 더 무서워했다. 나중에 이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니까 "노루도 겁이 많아서 걔가 너를 곰처럼 생각했을걸?"하고 말했다. 하지만 노루가 나보다 더 몸집이 큰 걸. 나에게 뛰어들면 이길 자신도, 피할 자신도 없었다. 유명하지 않은 오름이라 내가 사고를 당해도 바로 신고해 줄 사람이 없을 거 같은데...
☆ 제주도에서 야생동물을 마주쳤을 때
- 노루를 마주쳤으면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된다. 소리를 내면 도망간다고는 한다.
- 멧돼지를 마주쳤을 때는 정말 조용히 있어야 한다. 흥분시키지 말고, 등을 보이지 말고 엄폐물 뒤로 숨는다.
익스트림 제주도 오름...
은근히 매오름은 가는 길이 어렵다. 표지판이 없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잃기도 한다.
201번 기준 버스정류장 입구에서 올랐을 때, 철탑, 전기탑이 나오면 그걸 끼고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한다.
쭉 올라가면 앞으로 직진하는 거랑, 왼쪽에 숲속길로 더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길이 있는데 그 숲속길로 들어서야 정상이 나온다. 이 골목에서 노루랑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정상!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표선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내가 간 날은 날씨가 맑지 않아 그 감동이 전부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선 바다는 아름다웠다. 360도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이 매오름을 정말정말 추천한다. 하지만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정상에 올랐을 때 절대 올라왔던 곳 반대편인 나무 데크 계단길로 내려가지 마세요.
나는 같잖은 모험심이 있어서 "어차피 길은 다 이어져 있으니까!"라는 마음으로 가지 않았던 데크길로 뚜벅뚜벅 내려왔다. 나중에 빙 둘러서 원래 왔던 곳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자꾸만 반대편으로 내려가게 되고, 지도를 열어 반대편을 보았을 때는 버스정류장도 그 무엇도 없었다. 이제와서 되돌아가야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왕 온 거 끝까지 가자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걸었다. 난 그러지 말았어야했다.
끝까지 내려왔을 때 보인 건... 바로 묘지의 풍경이었다. 묘지들이 가득 있었고, 근처에는 어떤 공장이 있었다. 도로에는 그 공장을 오가는 엄청나게 커다란 트럭(그것도 공사용 트럭)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원래는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 201번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도로에 이 커다란 트럭들이 가는 걸 보고 마음을 접었다. 인도가 없었고, 그 트럭 하나 다니기만으로도 꽉 차는 도로였다. 내가 최대한 옆으로 비켜선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나를 못 보고서 바퀴로 찌부러트릴 것만 같아서 바로 몸을 돌렸다. 아, 나 또 정상 가야되는구나. 가파른 정상길은 두 번이나 오른 셈이 되었다.
올라간 시간 : 15분 - 왕복 30분. (그러나 정상 2번 오르느라 한 시간 걸림)
난이도 : 별 3개 (올라가는 시간은 짧다. 하지만 초반에 가파른 길이 생각보다 힘들다)
추천도 : 별 4개
한줄평 : 뚜벅이에게 너무 좋은 교통편, 짧은 시간 내에 오를 수 있는 오름, 위험하지 않아 아이 동반도 괜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