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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언어 생활

헐, 대박, 정말 없이 말할 수 있나요?

by HARU


얼마 전, 오픈한지 3달 정도 된

집에서 가까운 작은 개인카페에 한번 가봤다.

매장의 규모는 작지만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그리고 가격대가 상당히 괜찮았다.

요즘 시대에 아메리카노 한 잔에 3천원이라니.

그렇지만 이미 오전 동안에 커피를 2잔이나 마셔서

커피는 다음에 마시기로 하고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향긋한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손님 3명이 들어와서 음료를 주문했다.

마침 카운터 근처에 앉아 있어서

주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 분이 주문을 마쳤는데, 그 중 한 명이,

"사장님! 제 거에는 얼음을 조금만 넣어 주세요!"

라고 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같은 분이 한 번 더 말했다.

"정말 조금만 넣어 주세요!"


그런데 그 말이 내 귀에 탁 걸리더라.

'정말!? 왜 정말이라고 하는 거지?'

'처음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가?'

'정말 조금이라는 건 얼만큼을 말하는 거지?'

'얼음을 한 3개 정도만 넣어야 하나?'

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정말이라는 단어는

"이거 정말이야 믿어도 돼!"처럼 명사로도 쓰이지만

형용사나 동사를 강조해주는 부사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정말 맛있다!" "정말 재밌다!"

"정말 예쁘다!" "정말 슬프다!" "정말 아프다!"

이렇게 형용사를 강조할 때 쓰거나

"나 어제 정말 공부했어!" "나 회사 정말 그만뒀어!"

"나 그 애랑 정말 헤어졌어!" "나 정말 담배 끊었어!"

라고 동사를 강조할 때 쓰는데 쓰임새가 굉장히 좋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정말'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용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보니 얼마 전까지

웹소설을 한 편 번역을 했는데

거기에서도 정말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오는 거다.


예를 들면, "나는 정말 머리가 아팠다"

"그곳은 정말 멀었다" "정말 힘이 빠졌다"

"정말 약이 올랐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너무나 많이 정말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그대로 번역을 하면 같은 말이 빈번하게 등장해서

처음에는 매번 다른 단어로 대체했다.

‘정말’이라는 부사를 '매우, 몹시, 아주, 굉장히,

미치도록, 무척' 이런 단어로 바꿨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서 깨달았다.

'정말'이 강조의 표현이 아니라

그 작가분의 언어 습관인 것은 아닐까?

그분이 글을 쓸 때 습관적으로

'정말'을 붙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정말'이라는 단어를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그리고 굳이 없어도

말이 통하고 이해가 된다면 아예 빼는 쪽을 선택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문장이 깔끔해졌다.


'나는 정말 머리가 아팠다' 대신 '나는 머리가 아팠다'

'나는 정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대신에

'나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대신에

'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얼마 전에는 서울에 다녀왔다.

일본의 그림책 작가분이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거기에 출품된 그림동화 몇 편을 번역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전시되어 있을지 궁금해서

직접 가보기로 했다.



전시회장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근처의 카페에 들러 아침 겸 점심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크림치즈가 발라진 베이글을 주문했다.

보통 베이글은 냉장된 쇼케이스 안에 놓여있어서

그냥 먹기엔 좀 차갑다. 그래서 점원분이 내게

"베이글은 데워 드릴까요?" 하고 물어왔다.

그런데 빵속에는 크림치즈가 발라져 있으니까

너무 뜨겁게 데우면 맛이 없으니

나는 "살짝만 데워 주세요!"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점원분이 내게, "살짝만 데워드릴까요?"

하고 확인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네, 정말 살짝만 데워주세요" 라고 말한 거다.

그 순간, '나도 이럴 때는 정말이라는 말을 쓰는구나'

'정말이라는 말은 정말 편하구나!' 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좀 웃겼다고 할까?


글로 쓸 때는 연달아서 정말, 정말, 정말이라고

붙이면 글맛이 떨어지지만

일상생활에서 캐주얼하게 사용하기엔 참 편한 거다.

그래서 문어체와 구어체가 다른가 보다.

이렇게 또 겸손함을 배웠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사람들은 '헐, 대박'으로

대부분의 답변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놀랐을 때도, 공감할 때도,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도

'헐' 또는 '대박' 또는 '헐, 대박'으로 퉁치는 거다.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긍정적으로 쓰일 때는 "와! 정말 잘 됐다"

또는, "야~ 그거 참 놀라운 걸?"

또는, "와~ 잘했네 잘했어!" 등등.


또한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그럴 땐 '헐, 대박'이 "그거 참 안 됐구나!"

또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또는, '에이~ 말도 안돼!' 와 같은 뜻이다.


그런데 또 요새 젊은 사람들은 '헐, 대박'이라는 말을

안 쓴다고 한다. '헐' 대신에 '엥'을 쓴다는 거다.

'엥? 그게 맞아?' 이렇게 말이다.


또 '대박'이라는 말로 세대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은 4-50대가 '대박'이라는 말을 쓰고

2-30대는 잘 안 쓰는데

요즘 초등학생들은 또 '대박'이라는 말을 쓴다는 거다.

왜냐하면 40대인 부모님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일본에서는 한류 드라마나 K-pop이 유행하면서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한본어'라는 게 쓰이는데

그게 뭐냐면, 한국어 단어와 일본어 단어를

섞어서 쓰는 거라고 한다.

'알겠습니다' 라고 말할땐 '알았어데스' 라고 한다던가

'이거 진짜 귀엽다'라고 말할 땐

'진짜 카와이' 라고 해도 다 알아듣는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땐 '가득' 보다도 '잇빠이'라고 말하거나

주차할 땐 '오라이'라던가 주유할 때도

'만땅'이라는 일본말을 쓰기도 했었는데

시대가 참 많이 변했다는 게 느껴진다.






제 목소리를 통해 이 에피소드를 듣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ttps://youtu.be/50HEBlFDugQ?si=HkIN2f0m2XLjut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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