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난도 극복할수있게 만들어 준 두자녀의 사랑
여름이 시작되던 6월, 오랜 진통을 견디고 애타게 기다리던 귀여운 딸이 엄마와 아빠의 품에 안겼다. 결혼 후 우리 부부에게 가져다준 첫 기쁨이었다. 딸은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서 무엇이든 자기가 하고픈 일이면 월등하게 잘 해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집에서나 학교에서 보석처럼 빛났고 영특하게 자라주었다.
딸이 세 살이 가까워 올 때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1 월초에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은 엄마에게 오랜 진통 없이 수월하게 우리 가정에 일원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백만장자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누구도 부럽지 않은 가정이 되었다. 두 아이들은 부모가 바라는 대로 건강하고 우수하게 자라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은 고행의 여정이라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가져다준 기쁨이 내 삶의 힘든 여정에서 보약처럼 나를 강한 엄마로 변화시켜 주었다. 내 이민 생활에서 기쁨과 극심한 스트레스는 늘 동반자처럼 함께 찾아왔으며 교육을 통해서 딸이나 아들이 가져다준 성취가 그 힘든 고비들을 극복하는데 생수처럼 나의 내면에 아픔들을 말끔히 씻어주곤 했다.
결혼 후 일찍이 찾아온 알 수 없는 남편의 육신의 고통은 나의 이민 생활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시련들을 몇 배로 더 힘들게 몰고 갔다. 병원에서 일을 당당히 하기 위해서는 내가 취득해야 할 전문인 자격증, 생소한 문화를 이해하고 익히는 것, 언어를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훈련하는 것, 아이들에게 필요한 다방면의 교육을 잘 시키는 것은 부모의 책임인 동시에 나의 우선적인 일들이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빠는 척추 수술을 받아야 만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의사들의 진단을 받고 그때 부 터 6 회에 걸 친 기나긴 척추 수술이 시작되었다. 8 주간의 병원 입원을 요구한 척추 이식 수술은 나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첫 번째 수술이었는데 아빠의 육신의 고통에는 별다른 차이를 가져다주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같은 수술도 의사들의 헛수고였으며 엄청난 가족의 희생만 요구했을 뿐…
이런 와중에 딸은 동양인이 없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줄곧 수석으로 졸업을 맞게 되었고 우리 부부에게 힘든 세월을 기쁨으로 대처해 주었다. 말이 별로 없는 아들은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담임 선생님의 특별한 관찰로 다른 아이들에게서 볼 수 없는 행동이 아들에게 있다 하여 심리학자가 와서 I.Q 테스트를 받게 되었는데 보통 아이들에 비해 두뇌가 월등하다는 결과를 우리들에게 전해왔다. 그 당시는 별생각 없이 들은 이야기지만 아들은 공부가 끝날 때까지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들었고 토론토 공대에서 한국인을 빛내는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 때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교수의 간절한 청원도 뿌리치고 다시 컴퓨터를 전공하고 공부가 끝난 후 곧바로 미국으로 떠난 아들대신 졸업식에 초청을 받고 우리 부부가 참석을 하였는데 그날이 바로 천명이 가까운 참석자들의 기립 박수(Standing Ovation)를 받는 날이었다. 그때 아들의 상을 대신 받는 엄마는 기쁨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고 아들을 대신한 감사의 스피치! 청중들의 우레 같은 박수,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뜨거운 감격이 되살아온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캐나다 Brian Muloney수상과 과학 장관으로부터 날아온 축하의 편지, 가끔씩 지나온 세월이 그리워질 때 혼자서 읽는 편지들이다. 남편의 오랜 병환으로 힘들어할 때 아이들은 이렇게 우리부부에게 기쁨으로 삶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갈수있도록 이끌어주었고,우리가 쓸어지지 않고 견딜수있는 힘이 되주었다. 일일이 헤아릴 수없이 많았던 환희의 시간들, 내가 늦은 나이에 또 다른 전문인 자격증들을 획득했을 때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열자 못하고 한동안 주저하던 그 순간들은 내 생애에 기쁨과 시련과 도전의 혼합체였다.
내가 그토록 원해 오던 공부를 하기 위해서 만학도가 되어 밤을 새워가며 책과 씨름하던 시간들, 누구도 그 귀한 시간들은 빼앗아 갈 수 없는 가슴 벅찼던 세월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나를 기쁘게 해 준 일들이 또 나에게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이 막내딸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이 가시는 길에 나의 모두를 드릴 수 있었고, 임종을 앞두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신 그 기쁨은 이세상 어떤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처럼 내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또 하나는 20년이 넘게 남편의 병원생활이 계속될 때 나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한 그루의 나무. 바람이 몰아치면 아무 저항 없이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직전에 있었던 혼비 백산 한 아내, 엄마…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생명을 주신 분을 나의 아픔만큼 원망하고 살아왔었다.
그때 일생에 한 번 밖에 갈 수 없는 피정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을 때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고통 속에 있는 나에게 찾아오셨고, 홍수 같은 눈물로 내 영혼과 육신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다. 비워진 마음속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고,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있던 혼탁한 세속의 씨앗들을 송두리째 제거해주셨고, 깃털처럼 가볍게 많은 사랑으로 가슴 가득 채워주신 영혼의 안식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내 기억속에 머문다.
살아오면서 순간순간 나에게 주어진 헤아릴 수 없는 기쁨들,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후 펼쳐지는 오색의 무지개, 그 아름 다운 빛을 바라볼 때 인생의 여정이 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아픔만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해 준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말처럼 인간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승산 없는 투쟁”을 하면서 자기 삶을 마감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선택은 매일같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것을 찾을 때까지 60년이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쁨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과 투쟁하면서 찾아내야 할 각자의 몫이라면 ….
행복은 자기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 하여도 소유를 욕심 위에 올려놓으면 인생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그 길은 매일같이 적은 것에 감사하고, 자기를 비울 수만 있다면 인간의 본능인 욕심의 사슬에서 풀려 날 수 있을 터인데 이것을 알면서도 왜 그토록 어려운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 원인의 주인공이 자신일 때가 대부분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남을 원망 하기보다 감사를 느끼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신을 슬픔이나, 고통으로, 그리고 좌절로 구속하지 않을 때 진정한 내적인 자유가 찾아오기에… 내게 주어진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인생이란 아름다운 요리를 만들어서 이웃과 함께 나눌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내 인생에 25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평생 동안 잠을 굶주려야 했고, 혼신을 다해 달려온 지금은 지난 세월 모두가 아픔이 아닌 축복의 시간 속에 감추어진 기쁨 그 자체였다고 생각을 해본다.
2012-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