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실업급여를 3개월 정도 받고 바로 취업했다. 세번째 회사는 대기업이었다. 첫번째 회사는 돈이 없어서 사람을 못 뽑고, 두번째 회사는 하루아침에 사람을 잘라버리는 불안정한 스타트업이니, 다음 회사는 좀 안정적인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도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2년만에 알게 된다.
현재 운영중인 서비스를 리뉴얼하기 위해 대규모 채용을 했고, 나는 PM으로 입사했다. Product Manager 인줄 알고 입사했는데, 난 Project Manager 팀 소속이 됐다. 기획팀은 따로 있었다. 이력서 쓰고, 인적성 검사도 하고, 면접도 두 번이나 봐서 들어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지.. 날 뽑은 팀장님은 두달 뒤에 퇴사하셨다. 사실은 깊은 이해관계와 정치싸움 때문에 퇴사하신 것이지만, 이쯤되면 나에게는 팀장을 내보내는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웃어넘기고 싶다.
어찌저찌 기획팀으로 소속을 옮겨서 서비스 기획을 했다. 이때가 2021년이었는데, 판교에 있는 회사들이 신입사원 초봉을 다같이 올리는 퍼포먼스가 있는 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심지어 나랑 동갑인)신입을 가르치면서 일했다. 이때 연봉에 현타가 많이 왔다. IT 업계에서 일반적으로는 기획자보다 개발자 연봉이 더 높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다시 개발을 할까, 아예 신입사원 공채로 취업 준비를 다시 할까 같은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그래도 일이 재밌고 바빠서 계속 했다.
다행히 기획팀에는 팀장님이 계셨고, 팀장님을 제외하면 나까지 총 8명이었다. 그중 두 명과 팀장님은 디렉터님이 이 회사로 이직하면서 함께 데려온 사람들이었는데, 원래 기획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또 한 명은 실장님의 교회 지인이라고 했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 사람을 이렇게 뽑아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런 경우가 아주 드문 일은 아닌 것 같다.
언급한 사람들 중 한 명은 어쨌든 기획자로 프로젝트를 수행했지만 실제로는 디자이너가 한 작업을 마치 본인이 한 것처럼 포장해서, 남편이 다니는 국내 대기업 자동차 회사로 디자이너로 이직한 뒤, 바로 육아휴직을 냈다고 들었다. 언젠가 그분의 실수로 급여명세서가 팀에 공유되어서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실속없어도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을 실제로 보니 좀 씁쓸하다.
우리 팀은 블라인드 앱에서도 화제였고 뉴스기사도 많이 났다. 더 재밌는 이야기가 많지만 이런 자극적인 말만 하려고 글을 쓴건 아니니 생략하겠다. 몇몇 실무자들이 일을 할줄 모르고 가해자들이 퇴사하니, 남겨진 사람들은 일이 아주 많고 바빴다. 회사는 출퇴근 때마다 사원증을 태깅해야 드나들 수 있고, 월 최대 근무시간을 초과하면 출입이 안 됐는데, 그래도 일이 너무 많아서 몰래 담을 넘고 편법으로 일을 했다. 그래야 마감을 맞출 수 있었다. 이때 실력이 많이 늘었다.
일하는건 재밌었는데 사람이 너무 힘들었다. 이곳은 사담에 끼지 않는 사람을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원하지 않아도 자리에 붙잡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끼려면 나는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의 수입으로 충분히 살 수 있지만 자기계발을 위해 일하는 아내, 유행하는 TV 프로그램을 빠짐없이 챙겨보는 트렌드세터, 그리고 '지금 이 자리'의 동료들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상냥한 동료여야 했다. 이 자리에서 빠지면 험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값나가는 물건 한두 개쯤은 갖고 있어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아이비리그 대화에서의 후회 때문에(?)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지나고 보면 그게 동조였던 것 같다. 그냥 뿌리치고 나올 걸.
나는 “오늘 날씨 좋네요, 빨래 잘 마르겠다”라고 무심코 혼잣말을 하면 “집에 건조기도 없어?”라는 말이 돌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막힌 하수구 때문에 구정물을 밟으며 샤워를 해야 했고, 화장실에서 세탁기라도 돌리는 날이면 물이 발목까지 차올라 더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나면, 눅눅한 집 안에 빨래를 널어 말리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런 대화를 ‘정상인 대화’, 혹은 ‘대기업 직장인 대화’라고 속으로 부른다. 나는 왜 이 대화가 불편했을까. 내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 이 모든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뎠다. 난 어떻게든 회사를 오래 다닐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 이력서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공들여 준비해 리뉴얼 런칭한 서비스는,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종료가 결정됐다. 실장님이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하기 위한 재료가 필요했다는 뒷이야기도 들었지만, 솔직히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따로 있었다. 서비스 종료 결정이 났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자리에서, 팀장님이 동시에 자신의 연봉을 20% 올려 다른 회사로 이직이 확정됐다고 발표한 순간이었다. 미리 알고 있었으면 자기가 뽑은 사람들한테 귀뜸이라도 해 주지.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 팀장님도 우리가 누구나 아는 대기업 출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대기업들이 너무너무 싫어졌다. 그 유명한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이런 저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그런 곳에 있으면 그런 사람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이번에도 팀이 터졌으니 갈 곳을 정해야 했다. 팀을 옮겨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으나 퇴사했다. 죽은 서비스를 운영하기 싫었다. 퇴사하고 실업급여를 받으며 브런치북 퇴사일기 https://brunch.co.kr/brunchbook/nomoresalaryman 를 썼다. 그런데 또 정신 못 차리고 다음 회사에 취업했다. 퇴사일기를 진지하게 읽은 분들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퇴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