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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나로 Sep 19. 2023

힘든 건 굳이 안 겪어도 되는데

몰라도 되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구나

우리 이제 좋고 예쁜 것만 보자


열다섯 살의 너는 아빠가 꾸린 새 가정의 살림살이를 모두 도맡아 했다.

어린 너는 한겨울에는 빨래를 베란다에 건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어서

눈이 오던 어느 등굣길에 꽝꽝 얼어붙은 와이셔츠를 입고 가서 혼났다고 말했다.


성인이 되어 독립한 너는 햇볕 잘 드는 날에는 놀러 가자는 말 대신 빨래가 잘 마르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침구를 자주 빨거나 책장 위의 먼지를 주기적으로 닦아야 하는 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기울어진 집이라며 인터넷에서 조롱당하는 경사진 동네에서 너와 함께 살던 때가 기억난다.

집에 곰팡이가 핀 것도,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나온 것도,

대문 바로 앞에 길고양이가 자꾸 똥을 싸놓고 도망가는 것도

너는 늘 익숙하다는 듯이 뒤처리를 했다.

좀 못 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하거나, 주저앉아 울지도 않는다.


내가 처음 겪었던 모든 지저분한 생활방식과 불합리한 것들이 네게는 너무 익숙해서

너는 그게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 줄 모른다.


너는 다 쓰고 남은 것, 필요 없어진 것을 갖는 일에 익숙하다.

너는 좋은 것, 새것을 갖는 일을 어색해한다.


너는 찬바람 잘 들게 구멍 숭숭 난 마음으로 잘도 살아내 줬다.

나는 안 겪어도 될 경험들이 너를 아프게 했을까 봐서,

네가 깨끗한 환경에서 듬뿍 사랑받으며 지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종종 한다.


내가 너를 가여워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 자신도 모르게 눈물 나도록 다정한 순간들이 정말 많아서 다 적어내기가 힘들 정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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