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캄보디아 시엠립(Siem Reap)의 여기저기를 돌며 꿈결처럼 나흘이 흘렀다. 꿈결이라고 온통 감미롭고 흐뭇함만 남지는 않는다. 처음엔 그저 경이로워서 숨이 멎어졌다. 옛사람의 지혜와 정성이 깃든 대작에, 자연과 세월의 켜가 덧입혀진 신비에, 거듭 감탄하며 먹먹해졌다. 더 깊이 빠져드니 눈앞에 펼쳐진 외양만이 아닌, 그때의 전설과 신을 모시고 사원을 세운 까닭과 이루는 과정과 애쓴 사람 모습들까지 그려져, 천년의 시간을 되돌린 상상이 펼쳐졌다. 파노라마 같은 전경에 들어가 보니 애틋이 그윽하고 뭉근한 탄복에 이어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현실로 돌아와 내가 지금 여기서 이 유적을 보고 만지고 디디는 자체가 또한 경이롭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는 존재와 존재의 만남은 까닭 없이 일어날 리 없고,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참 경이롭다. 더욱이 시공을 초월한 벅찬 만남은 진작 품었던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기도 했다. 오랜 까닭이 점철된 앙코르의 표상에는 옛사람들이 지극히 공들인 그때와 그곳의 숨결이 서렸다. 치성을 드리고 정성으로 다듬어진 돌 하나, 신들의 이야기에 기예가 더해진 정교한 조각 하나, 허투루 놓인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무너지고 깎이고 부서져도 그때 그 숨결이 전해지기에 살아 있었다. 자연의 숨결과 닮은 고적(古跡)의 향기는 내 몸과 마음을 적시며 스며들었다. 그래서일까, 이 사원이 만들어진 까닭에 나와 만남의 의미가 더해져 새로운 까닭으로 파생되는 듯했다. 긴 회랑에 내 그림자가 겹쳤다.
시간과 공간은 늘 변하며 과거로 가버리지만, 신을 경배하는 큰 원(願)을 세우고 정성을 다해 신을 모신 그때의 원력과 그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돈독한 믿음과 나라와 백성을 위한 까닭으로 이루어진 형상에 다독이듯 세월의 더께가 입혀지면, 그때의 시간이 가라앉은 그곳은 갈수록 더 빛나고 정기가 어린다. 앙코르와트(Angkor Wat)는 크메르 제국 1122년부터 28년에 걸쳐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다가 완공 30년 후부터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신앙과 봉헌에 훗날과 후손을 위한 기원도 까닭으로 더해졌으려니, 오래도록 잊히고 방치되었다가 천년을 건너온 지금, 이곳은 괄목할 관광지가 되어 세상 사람들이 몰려들고 자손들에겐 생업의 터전이 되었다. 까닭은 여전히 이어지고 쌓인다.
시엠립에는 소실되고 무너지고 약탈당한 흔적과 크고 작은 유적이 곳곳에 있다. 동서로 남북으로 수백 미터에 걸쳐 수십 채의 사원(塔, pagoda)과 복도와 길을 만들면서, 떨어진 건물끼리도 문(gate)은 가로로 세로로 일직선으로 통한다. 신께 다가가는 계단은 가파르고, 탑 꼭대기마다 미소 띤 신의 얼굴이 내려다본다. 벽면에 빼곡한 부조는 편편이 전설을 이야기한다. 압사라(Apsara) 무희들의 춤과 의상은 부서지고 마모된 돌 조각만으로도 눈앞에 살아난다. 나무뿌리가 이끼 낀 사원을 삼킨 듯 지키는 듯 휘감고 나무만 옹차게 솟아오른 모습은, 한순간 스쳐 가는 인간에게 자연과 세월이 전하는 깊은 얘기를 담고 있다. 자리와 이름과 모습이 다른 사원과 형상들은 저마다 오묘한 특색과 공들인 까닭이 얼핏 보이기도 하지만, 말글로 형언하기도 어렵거니와 신을 추앙하고 뜻을 펼친 옛사람의 지극한 뜻에는 미칠 턱이 없다. 다만, 혼재된 시공 속에 빠졌던 체험이 부추긴 듯, 인간의 존재 의미가 새삼스레 머릿속에 들끓었다.
고전을 읽거나 고적을 보거나 느끼고 생각하는 바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까닭에 치중하는 나는 존재의 근원이 늘 궁금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지 않은 생명과 물질은, 생성 과정은 알아낼지라도 애초의 근원은 알 수 없다. 옛사람들이 전래하는 신들과 전설을 믿고 받든 까닭도 근원을 모르는 원초적 의문에서 시작되었지 싶다. 그런 까닭과 믿음은 수많은 갈래를 치고 그에 따른 형상들이 만들어지고 사원을 짓고 탑을 세워, 믿음을 우상으로 실현하여 추앙했을 터이다. 인간에 의한 창조가 어느 지점부터인지는 짚어 말할 수 없지만, 믿음을 위한 가없는 정성과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 정신은 후대에 전해지며 후손들의 믿음과 방식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갈래의 까닭이 되어 파생을 낳았다.
어디서 어찌 생겨나 어떤 인연으로 지구별에 내 부모의 자식으로 왔는지 모르는 나는, 어느 갈래에 있다가 이때, 이곳, 딴 나라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다른 갈래에 와서 나를 다시 생각하는가? 나는 무엇을 남기고 어디로 가는가? 예나 지금이나 의문은 까닭을 찾는 시작이다. 역사적인 유적의 존재와 보잘것없는 내 삶의 자취를 견줄 바는 아니지만, 내가 그나마 이뤘거나 했던 일이 인연 닿은 이들에게 다른 까닭의 씨앗으로 파생될 수 있었겠구나 싶다. 글쓰기도 그렇고 주관과 편견이 섞인 믿음과 언행이, 다른 견지에서는 오해나 왜곡이 되기도 해서 뜻밖의 영향이나 빌미가 되기도 했겠다. 또 그것이 까닭이 되어 만남의 결이 바뀌기도 하고, 자신은 모르는 채 어떤 틀에 갇힌 꼴이 아닐까….
굉장한 치적을 이룬 옛 제국의 권력자와 현재를 살아가는 알량한 평민의 존재가치 또한 비교할 수 없지만, 시대와 상황이 달라도 한 사람으로서의 일생은 흘러간다. 나름의 의문과 믿음을 가졌겠고, 그것을 좇고 발현하는 방식과 역량은 다를지언정 인간적인 고뇌도 있었을 테다.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고 위세를 드높이려 이룩한 성채 안에서 의문은 끝났을까? 동원된 사람들은 강요된 맹목에 갇히진 않았을까? 어쩜 원초적 의문에 대한 오답이 난무하여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성행했을 듯도 하다. 객쩍은 비약이지만 이런 상념도 유적지 여행에 따르는 맛이다. 발원과 치성이 이룬 앙코르의 걸작들을 보고, 나도 마음자리를 말끔히 닦고 나의 탑을 쌓아야겠다는 발원이 문득 치밀어 가슴이 뜨거워진다.
마음에 쌓을 탑을 생각하니, 중국 사서(四書) 중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에 나오는 "성어중형어외(誠於中形於外; 안으로 정성을 다하면 겉으로 모양이 드러난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앙카라의 유적이 당시 왕의 치적이긴 해도, 얼마나 많은 개인의 정성이 모여 저 형상이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이와는 전혀 다른 얘기지만, 한강 작가가 받은 노벨문학상은 실로 얼마나 경이로운 금자탑인가! 나는 재료도 재주도 없지만 그보다는 마음가짐과 실행이 부족해 아무런 형상도 이루지 못했구나 싶다. 자랑삼거나 후대에 남길 탑은 아닐지라도 나만의 탑은 쌓을 수 있다. 당장 앙카라의 유적을 보고 남다른 감흥도 일어났고, 존재의 까닭과 의미까지 뻗친 생각을 어쭙잖은 글로나마 기록해 두면 돌 한 조각이라도 되지 않을까. 그런 돌을 더 다듬고 모아서 쌓는다면, 내 삶의 자세와 의미가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멀리 나와 색다른 풍광과 유적을 보는 여행은 나를 다시 찾는 여행이기도 하다. 그래서 퍽 엉뚱하지만, 시공이 혼재되어 천년 후의 내가 천 년 전의 나를 보는 상상을 해 본다. 경이로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