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지아의 산골 이프라리(Iprari) 민박집에서
1. 여긴 두 시, 거긴 일곱 시
그대는 일어나 아침상을 차렸을까? 마른밥에 찬그릇 두어 개 놓였을까? 행여 갸웃하며 젓가락질이 멈췄을까? 나는 산봉우리 하얀 산골 흙담집, 푹 꺼진 침대에 옹송그린 선잠에서 깨어 시간을 잃었어. 여기나 거기나 지금인데, 시각은 다르겠네. 지구가 반의반 바퀴 돌면 같아질까? 우리가 거기 함께 있을 때도 그랬을까? 시간은 사랑처럼 쫓고 쫓기는 게 아닌데, 같은 사랑이 없듯 서로의 시간도 달랐을까? 내가 떠나지 않았어도 따로 갖는 시간의 괴리는 있었겠다. 같이 있을 때는 짧아서 닿지도 않던 생각이 떨어지니 길어져 그대에게 닿네. 아니면 서로를 친친 감고 엉켰던 타래가 풀어져 멀리 보여서 그런지.
그리 쉽게 잃을지 몰랐어, 시간도 사랑도. 어쩜 잃은 게 아니야, 비껴갔을 뿐. 당연시했던 소홀로 어긋났던 순간들, 비행기가 시간을 건너갈 때 알았어. 구름 위에서 보는 구름 모양들 겹으로 엉겼는데, 말로 글로 사진으로도 전할 수 없는 겉과 속, 그게 우리 마음 같아 보였어. 구름은 아래에서 볼 때와 달리 스쳐 지나갈 뿐 뭉쳐지진 않는 듯했어. 부딪히면 스파크가 일어나고 천둥 번개가 치고 참았던 눈물처럼 스콜이 쏟아지기도 하니 조심하는 걸까? 아닐 거야. 높낮이를 맞추며 기다리고 다가서는 중일 거야. 구름이 비가 되지 않으면 땅의 생명들까지 아파할 테니, 부둥켜 울고 순환하자고 잃었던 서로를 찾는 거야.
여기 일어나 손 뻗으면 닿을 천장에 그대 모습 그려지듯, 거기 그대의 식탁 빈 의자에 내 모습 어릴까? 다시 몇 나라를 넘고 시간을 건너 지구를 한 바퀴 돌더라도 거기 도착하면 그대와 같은 날이겠지. 얼마나 많은 다행을 징검다리처럼 딛고 물살 센 강을 건너왔는지 다 말하진 않을 거야. 그대도 외나무다리 지나온 얘기 다 하진 않겠지. 그래도 잃은 줄 알았던 시간의 얼레를 되감아 기우면 낡은 사랑에 덧댈 수 있을 거야. 오늘도 어제처럼 배낭을 메고 높은 산 가파른 길 묵묵히 걸으며 이제는 떠남이 아닌 다가섬인 줄 알겠네. 떨어져 따로 갖는 시간에서도 어리는 얼굴, 빈자리 보며 갸웃하는 기다림이 있으리니.
2. 철새는 돌아보지 않는다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를 보았어. 철새도 떠나온 집을 그리워할까? 아닐 거야. 철 따라 살 곳이 다를 뿐이지. 철새의 운명 같은 거, 사람에게 있을까? 운명은 변명이겠지만, 새가 부러운 사람은 여기 있잖아. 난 새에게 그리움 따위 묻지 않겠네. 사람은 집 말고도 그리움 많아서 돌아가는 중이라 할 거야. 그런데 이건 또 뭐지? 돌아갈 곳이 있어 결리는 발목의 통증. 본능을 누르고 이성과 속박에 묶여 참다가 어렵사리 풀려나왔는데 돌아갈 생각 하면 미리 슬퍼져. 아직 바람도 발길도 가벼워 여기서 또 다른 데로 가고픈데, 가는 때도 방향도 규칙도 모르면서 홀로 떨어진 어린 철새 꼴로 어정쩡히 갈림길에 서 있네.
나는 계절을 피하거나 찾아서, 아니면 그대를 혹은 사랑을 피하거나 찾아서,
낯선 나라 높은 산 가파른 길을 걷는 게 아니잖아. 나를 휘감은 안팎의 바람에 실려 왔으니, 거기서 말하지 못한 사랑에 여기서 애가 타도 그 때문에 휙 돌아갈 수는 없네. 다만 나를 찾는 방랑 또한 이기심이어서 그대가 아플까 봐 아프다. 힘겹게 기어올라 만년설을 밟고 사방을 봐도 그대가 없더라. 찾는 것이 흐려진 걸음들, 목적지는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니, 돌아가는 길도 딱히 정할 수가 없네. 돌아보지 않고도 같이 가는 새의 길을 따를까. 민둥산 야생화 곁에 앉아 개미굴이나 찾아볼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보일 테지. 나, 그대.
철새는 높이 날면서 돌아보지 않고도 자리를 바꾸는데, 나는 곁이 서늘해 자꾸 돌아본다. 감췄던 그리움이 이리 울컥거릴지 몰랐어. 우리가 같이 있거나 떨어져 있거나 돌아보지 않고도 나를 챙겨 준 그대와 달리, 나는 그대가 당연히 곁에 있는 줄 알고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앞서 날았던 거야. 사람은 몸과 마음이 따로 날 수 있다는 걸 몰랐지. 그댄 지금 곁을 보는지 궁금하지만 휑한 거리가 내 탓이기만 해서 묻지도 못하겠네. 떠나와서 보니 돌아가기 위한 여행인 줄 알겠는데, 그걸 그대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네. 돌아갈 지점은 어디일까. 시간의 얼레를 얼마큼 되감아야 함께 어르던 꼬리연이 다시 춤을 출까.
3. 잃은 데서 이어지는 길
낯선 글자들의 나라에서 또 길을 잃었네. 두리번거리다가 거기서 그대와 보던 북극성이 보였어. 멀리 와 보니 떨어져서 그리움이 아니더라. 함께 있어도 시간이 다르면 외롭고 그리워지잖아? 어쩌면 늘 따로였는데 함께인 줄 알았지. 외로움 그리움은 홀로 하는 향유이기도 해. 사람만이 하는 정신 활동, 황홀한 특권이야. 빠져들거나 돌아 나오거나 접어 두거나 하는 생각처럼, 길은 잃어도 또 어딘가로 이어져. 다시 다른 데를 더듬으려 정류장을 찾았어. 갈 곳을 아는 이들이 글자를 믿고 기다리더라. 이방인인 내가 뜻도 발음도 모를 글자를 짚어 어눌이 지명을 흉내 내니 사람들이 손뼉 치네. 덩달아 나도 웃네.
원주민이 친절히 일러준 길은 또 높고 깊은 산길이었네. 길을 잃으면 지친 몸보다 시간이 더 억울해. 지도를 보다가 피식 웃었어. 여기 글은 그림 같고 말을 물소리 같은데, 다 아는 줄 알았던 우리 말글도 그때 그대에겐 서툴고 부족했던 거야. 그대는 뭐가 떠올라 갸웃하며 돌아볼까? 고갯짓 한번 전해져오면 잃은 길이 돌아가는 길을 열어. 그러니 나는 처음의 괜한 욕심처럼 떠돌이가 될 수는 없지. 잠시 스치는 길이야 잃어버려도 대수롭지 않아.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은 마구 뒤섞여 있고 어딘가로 열려 있어. 단지 그대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도착하고, 그대가 거기서 팔 벌려주면 지난 길은 과정일 뿐이야.
나를 찾는 모험이니 어쩌니 떠벌렸고, 이국 경치에 입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과정은 변수투성이였고 거듭 길을 잃었어. 하얀 산정의 호숫가에, 강풍이 몰아치는 들판에, 사방이 트인 산꼭대기에 쳤던 텐트는 사진으로만 멋지게 보이지, 춥고 배고프고 쓸쓸한 낭만은 혼자 찾는 게 아니더라. 몇 번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서야 이 극과 극의 여정이 숙연해졌지. 말하지 못한 사랑, 그리움 다 거기 두고 온 걸 알았어. 하지만 우리의 어긋난 시간을 어찌 맞출지 모르겠더라. 또 철없는 말일까 참았지만, 돌아보지 않아도 곁에 있는 철새로 함께 날고 싶어. 석 달이 그대나 내게 긴지 짧은지 모르겠네. 철없는 철새가 울며 돌아온 얘기부터 할 거야. 뭉게구름 둥실한 가을 하늘에 꼬리연을 날리며 얼레를 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