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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8. 2022

재미있고 따뜻했던 외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어느 목요일 저녁. 남편이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겠다며 연락이 왔다. 귀한 식사의 기회이기에 우리는 접선하자마자 동네에 눈 여겨보았던 횟집으로 향했다. 회는 기대 이상으로 신선했고 서빙해주시는 분은 계속해서 서비스를 주셨다. 흥이 오르고 신이 난 우리는 소주를 네댓 병은 비웠던 듯하다.   


'뭐 어때, 내일은 금요일이고, 다음 주는 황금연휴야!'

휴일 줄줄이 예정되어있는 날씨 좋던 그날 저녁. 설레어하며 흥청망청 불목을 보냈다.


다음 날, 취기에 시달리며 출근을 했고, 퇴근 무렵이 다 된 5시 좀 넘은 시각, 이제 집에 가서 쉬면 되겠다 생각하던 찰나에 전화가 울렸다.


아빠였다.


"어 통화 괜찮냐?.."

"네 그럼요~"   


평소처럼 운을 떼신 아빠는 덤덤하시려 노력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50대 때 이미 중풍으로 쓰러지셨어도, 그에 따른 유증을 안고 30년 넘게 사셨어도, 매 끼니마다 술을 물처럼 드시고 담배를 달고 사셨어도, 그래서 맨날 외할머니와 옥신각신 하셨어도, 다시 일어나셨고 어눌해진 말투로도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우리 할아버지인데. 늘 그렇게 계셔왔고 계실 것만 같았는데, 인사할 틈을 주지 않으시고 떠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예감이라도 하신 걸까. 가시기 며칠 전 지방선거 날 새벽같이 일어나 홀로 미용실에 가서 곱게 염색을 하시곤, 거동도 편치 않으신데 투표까지 하고 오셨다. 떠나시던 날 아침에는 그날따라 자꾸 고맙다는 말을 할머니한테 하셨다. 오후에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다녀오시곤, 잠이 온다며 부엌 쪽에 와서 누우셨길래 할머니는 베개를 받쳐드렸고, 기운이 없나 싶어 죽을 끓이셨다. 죽이 끓길래, 일어나시라 깨웠지만 할아버진 영 답이 없으셨다.


심근경색. 어안이 벙벙했다.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계 제일이었던 우리 할아버지는 어려웠던 옛날 지역유지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그러나 공직을 그만두시고 사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재산을 지키지 못한 채 하나 둘 잃기 시작하셨고 가세는 금세 기울었다.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며 외가는 벼랑 끝에 몰렸고,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외가댁 모습은 조그만 정육점 안에 두 분이 지내시며 할머니 혼자 고기 장사를 하시는 모습이었다.   


재산은 잃었어도 한 때 부자로서의 자존심은 놓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살아생전 진즉에 자연장을 고집하시며 수의까지 다 준비해두셨더란다. 덕분에 염, 입관, 운구, 묘 봉분을 다지는 그 순간까지 온 가족이 함께했다.




입관 전 누워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장례 동안 스멀스멀 몰려오던 졸음 따위 한달음에 가시며 눈물이 왈칵 터졌다.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장의사께서 할아버지가 고집한 수의를 정성스레 입혀주셨고, 마지막으로 인사할 기회를 주다. 나를 비롯한 손자, 손녀들 그리고 엄마, 이모, 외삼촌들은 쭈뼛쭈뼛 할아버지께 다가갔고 작게나마 혼잣말로 인사를 하거나 손을 잡았다. 어른들도 아이처럼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오른발을 잡고 인사드리기로 했다. 직접 고르신 거라지만 낯선 소재의 천들로 꽉꽉 묶여 답답할 것만 같은 할아버지가 괜스레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지금 슬프고 아쉬워하는 우릴 보고 있기를, 내 인사를 마지막으로 꼭 받아주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 발을 주물러 드렸는데 너무나 차갑고 딱딱했다. 주물러드리고 싶었지만 주무를 수가 없는, 식어버린 발은 이번 생에서 우리와의 인연도 이만 끝임을 알려주는 듯 해 허망함을 더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이 발로 걸어 다니셨을 텐데, 한평생 서서 버티시느라 고생하셨는데, 따뜻하실 때 한 번 만져드릴 걸.




평생 외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케어를 한 몸에 받으시며 자칫 원망과 미움의 '짐'이 될 법도 했지만 그렇지 않고 늘 사랑받는 것이 할아버지의 능력이었다. 재미있으셨고, 쾌활하셨고, 그 연세에도 따라드리는 술을 한 잔 하시곤 '땡큐 베리 마치다~' 라며 껄껄 웃곤 하셨다. 


한평생, 특히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로는 수발과 생계를 모두 책임지며 고생하신 외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마침내 땅 속에 내려놓고 흙을 얹을 때까지 아이처럼 엉엉 우시며 말씀하셨다.   


'이래 갈 줄 알았으면  잘해줄걸..'    


단언컨대 중풍으로 쓰러진 할아버지가 이렇게 30년이 넘는 세월을 직접 걷고, 말하고, 맛보며, 좋아하시는 술과 담배를 안고 사실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이었건만, 그래도 할머니 마음속엔 조금의 원망이나 미움보다는 그리움과 미안함, 고마움만이 자리한 듯하여 보는 자식들은 그저 숙연해질 따름이었다.




할머니가 다시 적응하실 수 있도록 집을 정리해드리러 갔을 때, 난 또 한 차례 웃고 울었다. 조그만 거실 반을 차지하고 걸려있던 현수막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 팔순 때 직접 만들어드렸던 축하 플랜카드인데, 압정으로 꾹꾹 벽면에 달아두셨더란다. 자세히 보니 '김도식 아버님의 팔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대목에서 본인 이름 밑에 할머니 이름도 매직으로 삐뚤빼뚤 적어두셨다. 그리고 '아'버님 을 '어'버님 으로 변형해두셨더란다. 본인뿐 아닌 할머니도 함께 축하받는 거라며 저렇게 고쳐놓고는 얼마나 할머니한테 생색을 내셨을까.


'아버님'을 '어버님'으로 바꾸신 건 너무 교묘해 진짜 놓칠 뻔했다. 하얀 수정액은 어디서 구하신 걸까.



이렇게 유쾌하셨던 평생의 벗이 떠나가니 그간의 고생이 끝났다는 후련함보다는 허전함이 더 커서 갑자기 자주 편찮으시고 약해지신 할머니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누구든 곁에 있을 때, 함께 일 때 즐겁고 행복하자.


찰나의 10분 죽을 끓이는 동안 우리 할아버지가 떠나셨다지만, 매 순간 할아버진 떠나고 있었나보다.


두고두고 전 날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선어회를 먹으며 취해있던 어제저녁. 어제저녁에 한 번만 그냥 전화해볼걸. 가끔 외할머니께 전화드리는 일은 있어도, 외할아버지는 말씀이 어눌하시니 통화해도 잘 못 알아듣겠고, 그래서 바꿔달란 소리도 안 하고 끊곤 했는데. 어제 그냥 걸어볼걸. 그냥 인사라도 여쭐걸. 어제 그렇게나 시간이 많았는데. 어제...


오늘이 아쉬운 어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을 미루지 말아야겠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 사랑하자.


우리 모두는 하루를 살아냄과 동시에 하루만큼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한다. 언젠간 떠나는 존재들끼리 좀 더 표현하고, 아끼며 살다가라며 깨우침을 남기신 할아버지. 누군가 원망스럽고 미울 때면 늘 되새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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