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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7. 2022

엄마 나 이제 뭐하지? 2/3

나의 첫 발령지는, 전남 나주시. 이사를 자주 다니긴 했으나 전라도는 처음이었다.


지방 발령을 각오하고 입사한 회사였음에도 그 1년은 다소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는 주변환경이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6시 칼퇴근이 보장되는 '워라밸'이 지켜지는 상황이었음에도 나주에서의 나는 무기력해져 갔다.


내가 하던 회사 건물과 사택 간의 거리는 도보로 1분, 뛰면 30초.


편도 1시간 반을 광역버스에 끼여 통학하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출근을 하는 건지 잠깐 회사에 들르러 가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그 생활에 처음엔 어리둥절 했다. 퇴근을 하면서도 퇴근하는 것 같지 않았다.


퇴근 후엔 더 심란했다. 10세대 남짓한 사택건물에는 나 말고도 정 많은 대선배 이웃님들이 계셨다. 가끔 문을 두드리시거나 술 한 잔 하길 원하셨는데, 이게 또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커튼을 쳐 놓곤 창 밖으로 새나갈 불빛을 가렸고 그마저도 불안해 불을 켜지 않았다.


펜을 방 한 쪽에서 굴리면 반대쪽 벽을 만날때 까지 끝없이 굴러가는, 30살 넘은 경사진 방에서, 밥이라도 해 먹어볼까싶어 초반엔 어설프게나마 장을 봐오곤 했다. 그러나 하루가 머다 하고 나오는 (처음엔 큰 지네인 줄 알았던) 돈벌레를 울면서 잡고, 아무것도 해먹지도, 더럽히지도 않는데 어디선가 나와대는 바퀴벌레 때문에 각종 살충 약을 다 갖다 붙이며, 답답함에 창문을 열라치면 (비 오는 밤이면 때로 귀신이 나타난다던)  끝없이 펼쳐진 배밭을 마주하면서 내가 누리던 '평범한 저녁'을 놓아야 한다는 걸 점차 깨달았다. 현실과의 첫 악수였다.


어느 날 저녁, 또 한 번 의욕에 시동을 걸고 줄넘기를 뛸 '맨 땅'을 찾아 나갔다가 가로등 없는 차도에서 아슬아슬하게 교통사고를 피하면서 그날로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이후, 퇴근 후엔 남자 친구가 사준 '집 건축' 게임을 하며 현실 도피를 했고, 치킨 배달 주문을 거절당하고 나서부턴 저녁식사를 건너 뛰고 신생아마냥 8시 반부터 취침에 들곤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러나저러나 정말 따뜻했던 곳이었다. 함께 근무하던 선배님들이 대체로 연배가 높으셨기에 근무 시간 중엔 늘 조카처럼, 딸처럼 대해 주시는 틈에서 사랑을 쓸어 받았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막내를 가여이 여겨, 주말 행사는 제외해주셨고 일주일에 한 번 서울 본가에 가는 금요일이면, 나보다도 설레여하시며 기차역까지 바래다주셨다. 제철과일을 몰래 쥐여주시고, 냉장고 비워두지 말라며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밑반찬을 보자기에 꽁꽁 여매 들려주셔서 난감했던 적도 있다.


하루가 머다하고 이것저것 사먹여주신 덕에 이전엔 입에 대지 않았던 추어탕(짱뚱어탕도), 산낙지, 내장고기 등 "난이도 있는 음식들"을 두루 섭렵하였고 지금도 자주 생각이 날 정도로 입맛을 제대로 들였다.


그 시기 나와 똑같이 타지 생활을 하던 동기들과의 이른 봄 나들이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차를 타고 가다가 흐드러진 매화, 벚꽃을 보고 감명하여 내린 곳은 광양이었고, 내친김에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부르짖으며 남쪽 바다와 오동도에 발도장을 찍었다.

이른 봄 날, 광양 매화마을

이 예쁜 추억들과 기억을 선사한 곳임에도 나의 터전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앞서 언급한 퇴근 후 생활의 "단조로움"과 이곳에서 영원히 뿌리내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24시간 늘 나를 짓눌렀다.


이 때문일까. 나에게 큰 정을 베푸셨던 선배님들에 대한 감사함을 미처 그곳에서는 많이 표현하지 못했었다.


온전히 주변 분들의 관심과 애정 덕에 그 1년을 무사히, 건강히 보내고, 나의 연고지 근처로 근무지를 이동해 올 수 있었다.



사무실에 걸린 고드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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