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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8. 2022

선배님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맙시다!

무언가 다를 줄 알았던 S선배

우리회사에서 특히나 회식자리는 노골적인 희롱과 추행이 '잔잔바리'로 벌어지는 판이다.


언어적이든, 물리적이든 어떤 불쾌한 경험을 꼭 최소한 한 번씩은 하고서야 끝이 났고, 아무 일 없이 곱게 귀가하기란 어려웠기에 10년 전 입사초부터 갖게된 마음 속 편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입사 4년차쯤 한 선배님(과장님)을 알게되었다. 내가 관리하는 지점들 중 규모가 제일 큰 곳에서 내가 임지는 지표의 실적을 담당하시는 분이었다. 즉, 그 분이 잘 협조해주셔야만 내가 살 수 있었다.


하루는 그 지표의 일일목표가 펑크날 위기에 처했다. 스무 여곳 지점들마다 할당 목표치가 있는데, 규모가 작은 한 지사에서 못 채우겠다고 그만 드러누워버린 것이다. 담당자는 연락 두절된 채 잠수해버렸고, 당시 직속차장은 무능+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자였기에 칼퇴해버린 이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펑크가 나든말든 차장에게 문자나 전화 SOS를 쳐도 됐을텐데, 당시엔 어떻게든 해결하려 혼자 발버둥쳤다.


생각해낸 해결방안은, 보다 규모가 크고 여력이 있는 지점에 SOS를 해서, 아주 조금만 더 실적을 채워주십사 부탁+요청+징징대는 것. 그렇게 작은 지점의 미달을 메꾸어보는 것.


규모가 큰 1군 지점들의 담당자들에게 쭉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으나 당시 이미 퇴근 시간 이후라 대부분 연락이 닿질 않거나, 어렵겠다는 답을 주셨다. 그러던 중,  A지사 과장님과 전화연결이 되었다. 회식 중이신지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퇴근 이후, 그것도 술자리 중 전화를 걸어온 한참 어린 후배직원이 (굳이 안 들어줘도 되는) 번거로운 요청을 하는 꼴인데. 과장님은 잠시 고민하시더니, 결국 정말 감사하게도 사무실에 복귀해서 처리를 해주셨다. 펑크날 뻔한 지표를 구해주신 그 분께 그 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불신으로 얼룩 진 내 마음에 처음으로 존경심, 진심으로 감사함을 채워준 그 분은 그렇게 나와 친해졌다. 듣자하니 워낙에 업무를 잘 하시고 인간관계 좋으신 베테랑 과장님으로 이미 유명하신 분이셨다.


그리고 얼마 뒤, 과장님은 A지점을 떠나 바로 옆 파트로 전근 오셨다. 직군도, 하는 일도 달랐지만 늘 어떤 것이든 시원시원하게 협조하시고 모든 사람과 두루두루 어울리시며, 어린 직원들에게도 존대시는 모습이 보기좋았다. 내가 질색팔색하던 기성직원들과 분명 달랐다.



부서 전체회식이 있던 어느 날 밤, 1차가 파한 후 또래 직원들끼리만 슬쩍 모이기로한 2차 자리가 있어 가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과장님께서 '어른들'이 주로 걸어가고 있는 방향이 아닌 내 주변에서 담배를 한 대 태우시며 도셨다. 혹시 우리 또래의 젊은 직원들과 어울리고 싶으신건가 싶어 같이 가실 건지 의중을 여쭤보았다. 과장님은 기다리셨다는듯 흔쾌히 2차 자리에 참석하셨고 내 오른쪽에 앉으셨다.


맥주와 함께 한창 격의없고 진솔한 대화들이 이어지던 차에,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누군가 내 엉덩이를 꽉 움켜쥔 것이다. 


스치거나 살짝 만진 게 아닌, '꼬집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통증이 느껴지게 꽉 움켜쥐었다. 한창 떠들썩하던 용어 그랩(GRAB) 이 제일 맞는 표현에 가깝다. 취기가 한 순간에 증발하듯 사라지고 머리카락 뿌리가 쭈삣쭈삣 곤두섰다. 소름이 돋았다. 내 왼쪽엔 친한 언니가 먹고 마시며 신나게 떠들고 있고, 오른쪽은 존경하는 나의 선배님, 과장님이시다. 현재 그는 갑자기 말이 없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테이블 위의 과장님 전화기가 계속 울리길래,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전화기를 가리켰다.


"과장님 그만 가셔야할거같은데."


꺼지라는 표현을 에둘러 했다. 그는 얼버무리더니, 별 대답을 하지 않은 갑자기 자리를 떴다.


기분이 정말 부정적으로 오묘했다. 내가 방금 겪은 게 뭐지. 신뢰하던 우리 과장님은 어떤 맥락에서 나를 그랩하셨을까.


정신이 혼미해지길래 2차자리가 파하고 혼자 사무실에 들렀다. 갑자기 과장님에게 전화가 온다. 단 한 번도 이렇게 늦은 밤 개인 통화를 해본 적이 없건만. 씹었더니 문자가 다. 택시를 잡아줄테니 만나자고 한다.


무슨 얘기를 할 지, 아니 무슨 핑계와 변명을 할 지 뻔히 보였다. 회식 후 한 번도 개인적으로 이렇게 귀가를 챙긴적 없고 그게 맞는 건데, 별안간 웬 택시며 접선 타령이라니.


이미 버스탔다고 답장하고 회사를 나서는데, 망할. 하나 뿐인 출입문 대문에 떡하니 담배를 피우며 서 있는 게 아닌가.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데, 기어이 택시를 잡아준다며 잡아세운다. 완전 레알 불쾌해진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보며 말했다.


"알아서 간다고요"



만약 그 자리에서 어줍잖은 택시타령이 아닌 사과를 받았다면, 나는 사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못 받았기에 잃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된다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딸 뻘의 후배를, 아주 잠시일지라도 '이성'을 놓고 '이성'으로 봤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고, 온화한 인상 뒤에 감춰진 민낯본 것 같아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간 과장님에게 업무적으로 진 빚이 있었고, 몰상식 아재들과 신경전하느라 바닥에 떨어진 나의 평판을 어느정도 회복시켜준 점은 참작해야한다.. 이에, 신고는 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이후 그를 투명인간으로 대했고, 내 회사생활에서, 시야에서 그를 삭제했다.


얼마 안 돼 그는 승진을 하며 자연스레 전근을 갔다.


그랩 사건이 일깨워준 것이 많았다.


회사에서 만난 남자선배님은 아빠가 아니다. 오빠도 아니다. 그들이 무조건적 호의를 베풀길 기대해선 안 되며, 넙죽 받아서도 안 된다. 별 이유없이 자꾸 웃어주지도, 친절해서도 안 된다. 뭐든 적당히 해야한다.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맙시다.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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