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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7. 2022

당신같은 사람도 안 잘리는구나

만성 주정뱅이 P차장

보수적이라는 한 마디로는 절대 오롯이 담기지 않는 '옛날' 상사들의 사고방식은 참 타협하기 어려웠다.

이중 나를 퇴사 직전까지 리드했던 P차장 또한 아직도 잊을 수 없는 1인으로서, 비상식인 리스트 상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난 니가 제.일. 싫어."


전입 후 첫 회식에서 P차장이 꼬부라진 혀로, 그러나 분명하게, 사람들 앞에서 3번이나 반복했다. 첫번째엔 내 귀를 의심했고, 두번째엔 남들이 듣고나서 나를 어떻게 볼까 앞 일이 벌써 걱정됐으며, 세번째엔 놀란 마음과 복받치는 설움을 애써 누른 채 쿨한척 똥 싼 놈 뒷처리까지 대신 해줘야했다. "에이 왜 그러세요~ 저 이제 들어왔는데. 예쁘게 봐주세요." 라며.


젋고 빠릿한 신입이 없던 차에 들어온 '여'직원인 내가 신기하고, 반가운 나머지 주체하지 못하고 저지른 말실수라 이해해보려했다. 그러나 그는 저렴한 첫인상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을 뿐더러 직속 상사가 아님에도 나를 끈질기게도 이용하려 들었다. 업무시간중에는 업무적 호구로, 퇴근 후에는 술자리 호구로.


기자들과의 미팅이 많은 담당직무 특성을 이유(핑계)로, 낮에도 반쯤 취해있던 그는 퇴근 무렵에야 전 날 마신 술이 깨곤했다. 문제는 그 때부터 하이에나 처럼 함께 저녁을 보낼 상대들을 또 낚으러 사무실을 어슬렁댔다는 것이다. 나에겐 퇴근을 조금 앞둔 5시부터가 그래서 설레는 시간이 아닌, 지옥이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가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몰라 한 켠에 숨어서 떠는 아이마냥, 공포감과 불안감으로 마의 시간대를 하루하루 보내며 때때론 화장실에 숨어 6시가 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업무가 남아 6시 넘어서 몰래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을라 치면, 귀신같이 다시 나타나선 어디갔었냐며 술자리 조인을 권하던 그.


조직내 여성 비율이 적은 구성적 애로점이 있다곤 하나, 왜 회식때면 나는 최상위자 맞은편, 혹은 바로 옆에 앉아야 했던걸까. 왜 내 직속도 아닌 자가 최상위자 바로 근처에 방석을 놓아두고, 나를 향해 '여기 앉아' 라 당당히 손짓했는지, 그에 대해 왜 나를 포함한 아무도 찍소리하지 못했던건지 모르겠다. 앉아봤자 고운 꼴은 못 보는데 말이다.


P차장에게 전하지 못한 말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 일이 발생했다. 그 날 또한 회식자리에서 최상위자 맞은 편에 기어이 나를 앉혔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축에 속하는 러브샷이네, 희롱적 발언 리스닝이네, 업무의 연장이라 여기며 수행했다. 총 20여명 중 여자는 나와 비정규직(임시직) 두 명이 전부였고, 회식장소 또한 외진 곳이라 운전을 해서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자리가 파하고 내가 태워드리기로 한 선배님들과 이동하려는 참이었다.


"야! 너 누구누구 태워?" 또 그였다.


"최대리님, 이대리님 등 네 다섯 분들 가까운 전철역까지 바래다드리려고요."


"걔네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저 분들 모시고 가"


".....?"


'저 분'들이라 함은 그 날 회식자리의 최상위자 두 분이었는데, 만취상태일뿐더러 한 분은 운동선수 출신의 장신 거구셨다.


"저 이 분들 어디 사시는 지도 모르고, 운전도 아직 서툴러서요."


"oo사거리 알지? 거기에 내려드리면 돼."


어디 사시는 지 모르는 + 몸도 못 가누는 거구 두 분을  + 잠시 정차하는 것도 불가능한 큰 사거리에 + 무사히 내려드리라는 건데 머릿 속이 아찔했다. 차 안에서 주무시다 안 일어나시면? 가다가 무슨 일 있으면? 초행길이고 운전도 서툰데 어쩌지? 아마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이 지시는 수행하지 않을 거란걸.


니가 제일 싫단 소리를 듣고도,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에 드는 직원이 되어보고자 '아랫것'으로서 응당 최선을 다했던 지난 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고, 이젠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계속 우물쭈물하며 차를 빼오길 주저하자 P차장은 급기야 내 팔을 잡아 주차장쪽으로 밀어댔다. 태워드리기로 했던 선배들께 구원의 눈길을 보내보았으나 P차장이랑 충돌하기는 무리였는지

 "위키씨. 우린 알아서 갈게 걱정마.." 라는 작은 대답만 돌아왔다.


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며 P차장은

"너 여자 혼자라서 그래? 그럼 쟤(비정규직)랑 같이가." 라며 자꾸 나를 재촉해댔다.


여자 둘이면, 만취 거구 두 명이 거뜬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진심으로?


그럼에도 끝까지 버티던 중, 구세주가 등장했다. 우리팀 이대리님이었다.


"형, 그만해. 이건 좀 아니잖아"


격노한 P차장은 키가 작은 이대리님을 아래로 깔아보며 "뭐? 지금 뭐라고 했냐?@#$%^" 연신 욕설을 쏟아냈다.


이대리님은 P의 진노를 온몸으로 막으며 나에게 주차된 차 안으로 피신해 있으라 일렀고, 나는 비정규직 직원을 데리고 차 안으로 숨었다. 10분쯤 흘렀을까, 이대리님과 원래 내가 태우기로 했던 선배들이 황급히 내 차에 올라탔다.


 "위키씨, 빨리 출발해 빨리! 정문으로 가면 지키고 있을 거니까 후문으로 가자 후문으로!"


급히 도망치듯 장소를 빠져나온 나에게, 뒷 자리 한 선배가 말했다.

"위키씨, 그래도 위키씨 원하는 대로 했잖아. 그럼 이긴거야."



...... 거기서 그만 폭발해버렸다.


차를 한 켠에 세우고 P차장에게는 하지 못한 말들을 다다다다 쏟아냈다.


"대리님, 과장님들, 이게 뭐가 이긴거예요? 저를 어떻게 보셨을 지 모르겠는데 제가 왜, 그것도

 그 두 분을 무슨 수로 모시고 갔어야했는지 아직도 이해 안 가요. 저건 아니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눈물도 아까운 일인데 집에 와서 많이도 울었던 것 같다. 그 날 일이 별 일이긴 했는지 옆 파트 차장님이 뜬금 오늘 고생했다며 문자를 보내셨다.


그 다음날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해 커피를 내리는 나의 등 뒤로 또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까지 깨지않는 P차장 특유의 술냄새 체취가 코를 함께 찔렀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존재, 그였다.


"야 어제 잘 갔냐?"


본인 잘못을 분명 인지 하면서도 인정 하기 싫은, 아무리 밟아도 가만있던 지렁이가 혹여나 이번엔 꿈틀대지 않을까 아주 약간은, 걱정에 찬 특유의 간사한 목소리. 돌아보지 않아도 그 얼굴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꼴이 말이 아닌 몰골과 퉁퉁부은 눈으로 최선을 다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쳐다봤다.


다른 차장이 보다못해 P차장을 끌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내가 부서를 이동하고, P차장 또한 전근을 가며 예전만큼 자주 마주치진 않게 되었지만 P차장의 영향으로 내 인생 비상식사전이 좀 더 풍성해 졌음은 물론이고 가끔 마주칠 때면 대체 왜그런진 모르겠지만, 이제는 짠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남았다.


P차장, 어린 직원이 전입와서 열심히 해보려는 모습. 예쁘게 좀 봐주시지 뭐가 그리 고깝고 얄미우셨나요. 본인 딸 휴대폰은 유심칩 조립까지 해서 선물하는 자상한 아빠면서, 그 조립을 해드린 여직원은 술시중 담당으로밖에 안 보였나봐요. 제 능력과 열정보다 성별, 나이, 집안, 작지만 외제차라는 이유로 제 차마저 마음에 안 드셨는지, 유독 제 차만 5부제 검사를 죽어라 하고 다니셨죠. 샘나고 고까웠던 거란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짠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들을 힘 닿는데까지 다 기억할게요.


년이 흐른 지금, P차장은 내가 속한 부서에 전입오기 위해 용을 쓰는 중이다. 그 사이 나름 입지를 다져온 나는 온 힘을 다해 막고있다. (결국 막았다.)


나의 입사 초기 사건들이 어디까지나 내가 몸담았던 사업장에서만 더 도드라졌던 특성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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