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키워키 Jan 30. 2023

아빠는 좋지만 아빠네 가족은 어렵다

아빠 앞에선 자아가 생긴 사춘기 청소년 시기부터는 항상 센 척을 해왔던 것 같다.


왜 아빤 항상 바쁠까? 왜 이렇게 이직을 자주 해서는 이사와 전학을 밥 먹듯 하게 하는 거지? 왜 술을 과하게 드셔선 엄마를 힘들게 하지? 왜 밥 먹을 때조차 정신이 다른 곳에 가 계신 거지? 왜 엄마가 수십 년 간 제사와 차례 때문에 고생하게 하는 거지?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엄마를 힘들게 하고 우리 모두에게 고압적인 존재'로 인식됐고 은근한 반항심을 품은 게 사실이다.


제일 야속했던 포인트는, 아빠가 가지신 '원가족에 대한 애착'이었다.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대에 들어간 아빠는 집안의 희망이자 자랑이었다. 얼마 뒤 할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셨고 투병생활을 시작하셨다. 당장의 수술비와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든 형편이라, 아빠는 한창이던 고시공부를 접고 직장인 의료보험 자격을 득해야 했다. 사귀던 엄마를 설득해 결혼했고, 갓 시집온 엄마가 성심껏 병수발을 들었지만 할아버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아빠는 가장 빠른 입사를 보장한 '아무'회사에나 들어간지라 전공과는 무관한 보험 영업을 하시는 중이었고, 몸과 마음을 탈탈 털어 넣어 일하신 덕에 전국 최상위 영업맨에 등극했다.


그 무렵 내가 태어났다. 입이 늘어 살림은 더 빠듯해졌는데 막내 삼촌이 대학교에 입학했다. 부모님은 대출을 받아 학비를 대기 시작했다. 할머니 생활비를 책임져야 했고, 고모들에게도 자잘한 도움이 가야 했다.


당시 아빠 월급이 30만 원이었는데, 월 지출이  많을 땐 100만 원에 달했다고 하니 얼마나 쪼들렸을까. 기억이 남아있는 서너 살부터의 내 인생은 그래서 썩 밝지 못하다. 부모님은 툭하면 다퉜고 매번 주제는 돈이었다. 사비로 선후배 가리지 않고 밥과 술을 사주는 아빠의 카드값은 항상 많이 나왔고, 매월 현금 서비스를 받아 다른 카드값을 돌려 막는 엄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있었다. 갓난쟁이 동생을 4살 먹은 나에게 맡기고 유아교육 자격증과 면허를 따러 다니던 엄마는,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신다.


"애한테 애를 맡기고... 내가 진짜 미친x이었지."


엄마와 나, 태어난 동생뿐 아니라 원가족, 주변인 모두를 챙기려는 아빠의 책임감은 이상적이었지만, 업무실수로 5천만 원을 날릴 위기에 처한 경리 직원을 도와주는 등, 너무나 과했기에 몇 번이나 우리 가족을 파탄낼 뻔했다.


갓난아기인 둘째를 두고 차마 집을 나갈 수 없었던 엄마는 술 취한 아빠가 새벽에 귀가하길 기다렸다가 아빠가 오시자마자 내 손을 잡고 도망치듯 집을 나선 적도 있었다. 아빠가 엄마를 붙잡고 호통치는 장면들도 어렸던 나의 졸음을 쫓진 못해서, 난 그 와중에 졸리다고 울었다.


여러 불화의 씨앗 중 하이라이트는 할머니와 고모들의 '제례' 신봉이었다. 혹시 유교가 모태신앙이 아닐까 싶은 친가 식구들은 지금까지도 제사에 사활을 거신다.


명절 당일과 할아버지 기일 며칠 전부터 들이닥쳤고, 좁은 반지하 집구석구석  이불을 다 꺼내와 깔고 함께 자곤 했다. 결혼과 동시에 제사를 물려받은 엄마는 그 사이에서 송편과 만두를 직접 빚고, 동그랑땡을 만들어 부쳤다. 수일을 함께 보내고 제례를 치르고, 만들어둔 음식들을 소분해 고모, 할머니들께 싸드리면 마무리되었다.


모든 집의 명절은 그런 줄 알았다. 정신없고, 모두가 와서 훈수를 두고. 애써 며칠 전 만들어둔 음식은 막상 우리가 먹을 때가 되면 메마르고 딱딱해져 맛이 없는. 학창 시절, 매년 시험기간이 명절이나 제사와 겹치는 게 그리도 싫었다. 방 안에서 공부하려 해도 왁자지껄한 술자리 소리는 오래된 문짝쯤이야 쉽게 뚫었고, 내 침대까지 손님들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런 불편에도 무감하던 아빠는 원가족에게 둘러싸여 들뜬 목소리로 '우리 딸은 어디 갔냐'묻곤 했다.


치열하게 살아내는 아빠는 존경받아야 마땅했지만  원동력 안에는 식구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엄마의 불만은  세월 동안 쌓이고 굳어갔으며 대나무숲 역할을 자청하던 나도 언제부턴가 질려버렸다.


하루빨리 취업해서 독립해야겠다는 다짐신념이 되고, 하나의 종교처럼 내 안에 뿌리내렸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됐다. 자유분방하고 가족 간 터치도 거의 없어 보이는. 명절이나 제사에 연연하지 않고 산 사람들이 행복하면 된다고 믿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우리 집과의 상반된 그 분위기가 매우 큰 몫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딸은 아빠 닮은 사람을 배우자로 택한댔는데 나는 예외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가 별 거냐 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