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할머니께 미리 연락을 주고 오시라 말씀드렸더니, 큰 고모가 돌연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부모가 자식 집에 허락 맡고 가야 하냐"
며 역정을 냈다. 직접할머니를 모시고 들이닥쳐선 엄마에게 한 소리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같은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엔 목소리가 약한 엄마를 거들어줄 생각으로 끼어들었는데, 아빠의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인지 난데없이 생전 처음 볼 정도로 폭발해버리셨다.
할머니가 거지야!!!!!? 살면 얼마나 사신다고
아빠가 식탁에 쾅 내려친 유리컵은 깨져버렸다. 순간 마음속으로 부여잡고 있던 무언가가 틱-하고 끊어진 것 같았다. 놀라고 화가 나고 슬퍼서 머릿속이하얀데, 속사포처럼 말들이 튀어나왔다.
누가 거지래? 말씀하시고 오라는 거잖아요. 엄마가 이제 노인 될 판인데 이런 말도 못 해? 내가 왜 지방발령 나는 회사 들어갔는 줄 알아? 나 이 집 뜨고 싶어서 그래. 내 집 같지가 않아서
부랴부랴 짐을 싸며 엄마에게도 짐을 싸라고 했다. 일이 커져 어쩔 줄 모르는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당장 입을 옷 몇 벌을 챙겼다.
이번엔 내가 엄마 손을 잡고 나왔다.
호기롭게 나온 모녀는 정작 멀리 가지는 못한 채 동네의 한 모텔에 들어갔다. 숙소에 와서도 울분이 가라앉지 않아 아빠에게 엄청난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그간 엄마의 시댁이 내 시댁 같았던 이유들에 대해서. 속에 맺혀있던 것들이 뻥 터진 것처럼 줄줄이 튀어나와 말풍선 안에 자리를 잡았다.
흥분 상태에서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신확인용 숫자 "1"이 사라졌다. 아빠가 또 나한테 뭐라고 하나 봐야지, 뭐라 하시면 또 따져야지, 씩씩대며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막상 보내 놓았지만 심했나 싶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답장마저 오지 않으니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랑 나는 그렇게 낯선 곳에서 이틀 밤을 보냈는데, 마침내 아빠에게 답장이 왔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정말 몰랐다. 미안하다. 아빠도 바뀌어보마"
3일 동안 아빠도 얼마나 고민하고 위축되셨을까,눈앞이 뿌예지며 코 끝이 찡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멀어졌던 아빠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집에서 멀어지려고 취직했다고 떵떵거릴 땐 언제고, 막상 타지에서 외롭게 돈을 벌다 보니 아빠 생각이 났다.
맨 땅에서 뭣도 빽도 아무것도 없이, 부실한 보험회사 평사원 출신으로서정상까지 오르신 아빠를 보며, 왜 밤마다 툭하면 잠 못 이루시고 서성이신 건지, 간혹 빨리 퇴근한 날에도 왜 영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들으며 공부했는지, 왜 몸은 집에 있어도 정신은 회사에 두고 오신 건지,엄마는 왜 동생을 낳으러 홀로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했던 건지, 한평생 치열하고 바빴을 아빠의 일상들이 가늠되기 시작했다.
모두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날
엄마는 가정폭력상담소에 자원봉사를 나가시면서 많은 내담자를 만나셨고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본 결과, 현재 상황이 스스로가 자처한 것이기도 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아빠에게 명료하고 단호한 의견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 시작했다.
아빠도 예전만큼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을 펼치시지 않는다. 여전히 자잘한 다툼을 하시지만 엄마의 지위가 많이 높아졌달까.
동시에, 할머니 또한 기력이 많이 쇠하셨고 약해지셨다. 옛날에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에게 기대가 있으시면서도 그만큼 눈치도 가장 많이 보시고, 의지하신다. 할머니 본인도 누군가의 며느리였고 이 이상으로 희생과 헌신하셨을 테지.
물론 아직도 제사상에 닭이 빠졌다는 지적이 들리고, 아무도 안 먹길래 할머니와 협의해서 생략한 것이라는 엄마의 대답에 "산 사람이 먹는 건가, 죽은 사람 먹자고 하는 게 제사지" 라 응수하는 고모가 계시지만.
밤 12시에 지내느라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었던 제사는 저녁 8시로 앞당겨졌고, 모두가 제사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관점도, 내가 결혼 후 잘 참석하지 못하면서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제례를 어머님 아버님 두 분이서 간소하게 지내시고 우리에겐 부담 지워주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꼭 오지 않아도 된다고도 하셨다. 당일날 함께하더라도 더이상 새벽 5시부터 뚝딱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 한없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속삭이며 말을 하거나 양말을 안 신었다고 혼나기 일쑤였던 지날 날은 더 이상 없다. 명절 전 날에 쭈그리고 앉아 전을 부치는 게 아닌 맛집에 가서 밀린 얘기를 나누며 술을 한 잔 한다. 너그러운 시부모님을 만나 감사한데, 한편으론 엄마가 고생한 덕을 내가 보는 건가 싶기도 하다.
세상이 변했고우리 집마저변하고 있지만, 그러면 그런대로 아직도 엄마 시댁은 내 시댁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