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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Jul 15. 2023

어떤 무늬

오정희, 「저녁의 게임」

무의미한 날들이 이어진다.


여자가 집 밖의 풍경을 가끔 훔쳐보다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화투를 치고, 집을 나가 공사장의 인부와 몸을 섞고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무미건조하면서도 섬뜩한 일상이다.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 그녀의 집 안에 고여 있다. 그녀는 어둠을 응시한다. 바라보는 얼룩이나 풍경에서 자신의 내면을 읽어낸다. 그 내면은 불우한 가족사에 대한 기억이며, 기억은 곧 상처다. 왜 이런 삶이 이어지는지 따지고 들자면 더욱 미망에 빠져들 것 같은 삶이다. 오빠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장애아를 낳고는 정신이 이상해져 정신병원에 보내져 그곳에서 죽는다. 무기력한 아버지보다도 어머니의 죽음은 더 큰 상처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상처를 유난스럽게 드러내지 않는다.


무기력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하루하루를 그들은 저녁의 게임을 통해 이어간다. 화투는 부녀지간 소통 수단이자 허망한 관계를 드러내 주는 매개체인 듯하다. 시간을 지워나가기 위해 기억을, 상처를 망각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시적이고 절제된 문장은 사회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대적 상황이 충분히 반영된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배경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내면에 어떤 형태로든 시대적 무늬를 새긴다. 그 상처를 마주하고 품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사회적 상처로부터 자유롭기란 불가능한 탓이다.


「저녁의 게임」은 개발독재의 파헤쳐진 시대를 바라보는 내면의 어떤 무늬처럼 보인다. 그 무늬는 바람이 모래사막에 남긴 흔적처럼 실존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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