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내던 날
1. 13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다.
올초 회사에서 450km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오고
육아 휴직이 끝난 후에 무급 휴직을 연달아 쓰면서
공공연하게 '그만 둘 사람'이 되었기에 담담하게 퇴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사직원을 제출한 그 날부터 싱숭생숭하고 우울한 마음을 나도 어쩔줄 모르겠더라.
퇴직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날
팀장님이 마지막으로 다 같이 사진 찍자고 하시는데
에이 무슨 사진이에요 하면서 울컥.
팀 단톡방 나가기 전 인사 멘트 적는데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나냐
친한 동기들 만나서 차 한잔 하고
나 이제 마지막인데 정류장까지 좀 데려다 주라! 하고 버스 타는데
13년 사귄 남자한테 이별통보한 것 마냥 왜 눈에서 비가 오냐고요
순진하고 멍청하고 어리숙했던 나의 청년시절을 보낸 곳.
그렇게 탈출하고 싶던 회사였는데 막상 떠나려니 아 - 서운하다.
결국 사람 몇 명 남았다.
나의 젋은날을 함께 품고 있는 사람들.
시절 인연일지라도, 참 고마웠어요.
2. 과외순이를 보냈다.
나의 과외순이는 중간고사를 망쳤다.
'망쳤다'는 말이 너무 온화하게 느껴질 정도로 시험을 처절하게 못쳤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나와 학생의 어머니는 주말 내내 머리를 싸매고 많은 얘기를 했다.
아무래도 일주일에 두 번 하는 과외 보다는 매일 숙제를 봐 주는 전과목 학원이 낫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 이대로 끝내기 아쉽다며 마련한 자리에서
아이는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얘기했다.
서울대 가도 돈 못 버는 사람 많잖아?
맞는 말이지만 (뜨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공부하는건 또 아니거든.
아 이걸 뭐라고 설득해야 하지.
공부를 잘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친구를 으쌰으쌰 끌어올려줄 수는 있지만
애초에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모르는 친구를 책상에 앉히는건 내 능력 밖인 것 같다.
아이가 새로 옮긴 학원에서 적응 잘 해서 기말고사땐 성취의 기쁨을 맛보게 되길 -
3. 다시 원점.
퇴사 + 꽤나 열정을 쏟았던 일마저 그만두고 보니
대체 나의 쓸모는 뭘까 싶다.
늘 어수선한 집과 몸무게 안 느는 삥이를 보면 주부로서도 별로고.
샌님 인생 삼십몇 년.
책속에 파묻혀서 살고싶은 내향인에 (책을 많이 읽지는 않음. 박학다식하지도 않음. 그저 책을 좋아함)
마음도 간장종지만 해서 사람 대하는 일을 벌이기도 어려울 것 같고.
늘 생각속에 빠져 허우적대다 자책하기 일쑤.
내가 잘하는 게 있는지
나에게 남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있긴 한지
실 모르겠다.
다만, 삥이녀석한테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엄마로 보일까 두려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