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드러운날 원영적 사고 적용하기
아이가 밤새 열나고 토해서 꼬박 밤을 새고 (불행1)
집 근처 소아과에 오픈런을 했는데 마침 휴가를 가셨다. (불행2)
급한 마음에 아이를 차에 태워 나오다 주차장 기둥에 차 문을 완전히 긁어 먹었다. (불행3)
병원 대기실에서 아이는 떡뻥과 우유를 와르르 흘려 버렸다. (불행4)
화장실에 뛰어가서 휴지를 잔뜩 가져와 바닥을 닦는다. 애는 앵앵 운다. (불행의 쓰나미)
애도 아프고, 차는 더 아프고(차는 면역이나 치유의 개념이 없으므로) 내 마음은 더더 아프다.
남편은 근무중에는 연락이 되지 않아서 더 답답하다.근데 잠깐만, 남편한데 징징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너 나이도 겁나게 많잖아. 이 상황은 어른인 내가 오롯이 감내해야하는거잖아.
바닥을 닦다 손에 묻은 우유를 씻어내고, 4일치 물약을 한입에 털어넣으려는 아이와 씨름한 뒤에
'요즘 원영적 사고라는게 유명하다면서요?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나요?'하고 육아 단톡방에 하소연을 했더니 단톡방에 원영씨가 여럿 강림하셨다.
'문 연 소아과 있어서 진료를 빨리 볼 수 있어서 럭키비키야'
'나라도 안 아프니 럭키비키야'
'차를 바꾸고 싶었는데 잘됐잖아?'
'다른차 안 긁었으니 럭키비키야'
실없이 피식대다보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멀리 크루즈 여행중이셔서 연락이 되었다 끊겼다 하는 시부모님도 자차 처리하면 되니 걱정 말라 하시고
아,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이도 단순 열감기란다. 어린이집 같은반 친구들은 수족구에 걸렸다는데 불행 중 다행이랄까.
뒤늦게 연락된 남편도 괜찮다고, 다만 주차한 차 뺄때 엑셀은 밟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뿐이었다.
평소 지나치게 무던하고 감정의 동요가 없어서 갑갑하고 서운한 적도 많은 남편인데, 출고한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패밀리카를 몰다 사고를 냈는데도 "다음에는 조심해. 자책 너무 하지말고. 나도 처음엔 긁고 다녔는데 뭐"
하고 마는걸 보니까 더 미안하다. 보험 담당자가 생각보다 차 손상이 심해 수리기간이 꽤 오래 걸릴거라고 해서 죄책감에 머리만 빡빡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자, 보자.
내가 걱정했던 것 만큼 아이는 아프지 않았다.
설령 예상보다 아팠다 해도 병원에 가서 진료 받고 약 먹이고 보살피면 될 일이었다.
조금 천천히 가면 대기실에서 10분쯤 더 기다리면 그만인거다.
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면 심호흡을 크게 했어야지.
그럴수록 더 정신줄을 잡고 차갑고 차분하게 행동했어야지.
말도 안되는 궤적으로 핸들을 꺾으면서 엑셀까지 밟아서는 바보멍청이놈마냥 주차장 기둥에 차 문을 아작을 내버릴 일이 아니었다고.
아무튼, 걱정했던 전염병까지는 아니었던 아이와
실없는 얘기 던져준 단톡방 친구들과
어떤 일에도 덤덤한 남편과
다른 차를 다치게 하지 않고 자멸한 우리차까지
난 정말 럭키비키닷!
+
남편이 혼잣말로 우리 차는 '테세우스의 배'같다고 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직접 찾아보라고 웃는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