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노 산페이(味の三平)
일본 열도 중에서도 유독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하다는 삿포로에 감히 그 ‘삿포로’라는 이름을 가져다 당당히 붙인 음식이 있다. 바로 삿포로 라멘이다.
라멘이라는 음식 이야기를 할 때 대륙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돼버렸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사히카와나 하코다테처럼 오래전부터 소리 소문 없이 자긍심으로 라멘을 만들어온 지역들이 있어서인지 최근에는 홋카이도 라멘이라는 말도 쓰는 것 같지만 구수하고 짭짤한 된장 맛 수프에 뜨끈한 라드유를 띄운 라멘을 보면 역시 이건 삿포로 라멘이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 라멘의 역사를 말하고자 할 때 삿포로 라멘은 중요한 열쇠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일본의 첫 라멘이 북해도 대륙인 하코다테에서 탄생했다는 설로 1884년 신문에 첫 라멘 광고가 실린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것. 둘째, 돼지뼈를 이용한 육수의 라멘은 큐슈가 유명하지만 북해도 역시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예부터 먹던 돼지뼈 육수가 발전돼 지금의 삿포로 라멘이 되어 유서가 깊다는 것. 셋째, ‘라멘’이라는 정확한 용어가 1922년 삿포로에 있었던 죽가식당(竹家食堂)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삿포로 라멘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돼지뼈 육수에 된장을 풀어넣고 돼지기름(라드)을 녹여 올린다는 것이다. 추운 날이 많은 지역답게 빨리 식지 않으면서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고 뱃속이 든든해지는 특성을 잘 살렸다. 하지만 원래는 정유 라멘(正油ら ー めん:삿포로에서는 간장 라멘이라고 하지 않고 정유 라멘이라고 했다고 함)과 소금 라멘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금도 운영 중인 아지노 산페이에서 손님이 된장을 넣어달라고 요청한 것이 시초가 되어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삿포로 라멘=된장 라멘의 이미지가 굳어졌다.
삿포로에 가면 된장 라멘만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대다수의 가게에서는 된장, 간장, 소금의 세 가지 라멘을 내어놓고 있다. 가게에 따라 주력으로 하는 라멘들이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된장 라멘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삿포로 라멘에는 옥수수콘이나 버터가 들어간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부분이야말로 그렇지 않다. 라멘 토핑으로서 옥수수콘과 버터가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지만 관광지 외에 삿포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가는 라멘집에서는 추가하지 않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이외에도 특이한 사실이 하나 있다. 면발을 중요시해서 우동이나 소바는 자가제면을 많이 하는데 북해도의 라멘은 가게에서 면을 만드는 경우가 드물고 대체로 제면소의 면을 가져다 쓴다는 것. 이것은 북해도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북해도민들의 삿포로 라멘 사랑은 무척 남달라서 2001년 10월, 홋카이도의 유산 25 중 하나로 삿포로 라멘을 선정했다. 삿포로 라멘은 그들에게 소중한 보물인 것이다.
도민의 자긍심이 된 삿포로 라멘 가게는 시내는 물론 주택가 외진 곳까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있고 나 역시 삿포로에 사는 동안 꽤 자주 삿포로 라멘을 먹었었다. 그렇게 눈으로 뒤덮인 추운 겨울의 한 복판에 찾아가 수없이 받아 들었던 뜨끈하고 진한 삿포로 라멘을 한 젓가락씩 회상하며 가게들을 되짚어 볼까 한다.
삿포로 라멘의 명성은 일본을 넘어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북해도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불가결하게 한 번 이상은 꼭 먹어보게 된다. 그런 삿포로 라멘이 시작하게 된 역사적인 가게가 바로 이곳, 아지노 산페이다.
평범했던 간장 라멘과 소금 라멘 외에 ‘된장’을 추가한 것 만으로 단숨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우연한 단골손님의 요청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이 스토리는 삿포로에 살고 있을 때 알게 되었다. 역사적인 장소이니만큼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가게로 향하던 날은 괜히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게의 위치가 좀 이상했다. 4층? 저렴한 덮밥집이나 패스트푸드도 버젓이 단독 건물에 널찍한 주차장까지 확보하고 영업하는 삿포로에서 삿포로 라멘의 원조가 어떤 건물의 4층에 입점해 있다니, 의외였다. ‘뭐 그래, 라멘집들은 작게도 많이 운영하니까.’라고 생각하며 건물에 들어섰는데 이곳은 내가 자주 들락거리는 화구 판매 빌딩 센트럴이 아닌가… 전 층이 문구와 화구를 판매하고 있는 데다가 작은 빌딩이어서 이곳 어디에 라멘집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4층으로 올라가니 한쪽 구석에 아지노 산페이(味の三平)라고 써진 노렌(暖簾)이 눈에 띄었다. 삿포로 라멘의 산 역사가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안으로 들어가니 주방을 마주 보고 놓은 의자 몇 개가 전부인 좁은 공간이 나왔다. 안 그래도 좁은 가게가 주방이 반이다. 머리가 하얀 2대째 사장님의 지휘 아래 분주하게 움직이는 활기찬 주방의 모습을 보니 라멘의 맛이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손님들 앉으라고 놓은 의자는 다닥다닥 붙어있으면서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양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대체로 추가로 뭘 넣어먹는 건 잘하지 않는데 묘하게 뭔가 넣어먹어보고 싶게 만드는 배치다.
가격도 시내의 내로라하는 라멘집들보다 저렴하다. 그러나 면을 봉긋하게 담고 다진 돼지고기와 숙주, 죽순, 무순을 올려 내어져 온 라멘의 맛은 정통 그 자체였다. 시내의 다른 된장 라멘들의 기름지고 짠 강렬한 맛을 생각하면 첫 한입은 어딘지 슴슴하다고 느껴지지만 먹다 보면 알 수밖에 없다. 그 담백하고 고소한, 깊이 있는 감칠맛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니시야마 제면소에서 가져오는 구불구불한 면은 살짝 쫀득하고 딱딱한 감이 있는 카타멘인데 그 불규칙한 곡선을 따라 느껴지는 거친 식감이 국물과 아주 잘 어울린다.
식사를 끝내고 나가는 내손에 장미모양 초콜릿 하나를 꼭 쥐어주시는 유쾌한 2대 사장님과 열심히 일하고 있는 4대째가 될 사장님의 손자를 보니 삿포로 라멘의 원조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갈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주소 札幌市中央区南1条西3丁目2 大丸藤井セントラル4F
오픈 화-일 11:00~18:30
휴무 월요일
가격 미소라멘, 쇼유라멘, 시오라멘 850엔 동일. 차슈멘, 완탕멘 1050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