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흥겨운 삿포로의 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턱 막히는 여름,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를 냉동해 두었던 맥주잔에 콜콜 따라 한 모금 마시는 상상을 할 때 그 상상 속의 맥주는 언제나 삿포로 맥주였다.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 특정한 맛에 대한 기억 때문임이 틀림없는데 내 머릿속에 맛있는 이미지로 남아있는 맥주의 맛이 삿포로 맥주였기 때문일 것이다.
삿포로 맥주사는 일본 최초의 맥주 제조 회사이다. 삿포로의 역사가 삿포로 맥주사의 역사와 함께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삿포로와 삿포로 맥주사의 관계는 특별하다. 셀 수 없이 많은 한정판의 캔 디자인중에는 프로야구 개막을 알리는 알리는 것에서부터 삿포로 관광 스폿을 소개하는 것까지, 도시와 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느껴진다. 일본에서 가장 큰 맥주축제 역시 삿포로에서 열리는데 여기엔 일본 4대 맥주회사인 삿포로, 아사히, 기린, 산토리가 참가한다. 잠들기 힘든 더운 여름밤, 키보다 큰 통에 맥주를 담아놓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왁자지껄 즐기는 축제는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도 찾아올 만큼 흥겹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만나는 캔맥주들 역시 무척 다채롭다. 예쁜 패키지를 입고 있는 특별한 맥주들은 계절 한정이나 특별 행사 한정으로 잠시 나왔다 사라진다.
늘 식구들과 함께 살다가 타지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익숙하지가 않아 밤늦은 시간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 자주 들락거렸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파자마 차림으로 나가 어슬렁 거리며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우연히 캔맥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에는 그저 종류도 많고 예쁜 캔이 많아 하나씩 사들고 들어갔다. 홀짝거리기만 하는 것이 심심해서 스케치북에 끄적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맥주를 마시는 재미보다 그림을 그리는 재미에 빠져 새로운 디자인의 맥주캔을 사들였다. 그 시간이 너무너무 좋았다. 마시는 재미에 감상하는 재미에 그림을 그리는 재미까지 삿포로의 맥주는 정말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한 셈이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맥주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술과 안주를 함께 즐기는 곳을 보통 이자카야라고 하는데 유흥가로도 유명한 삿포로에도 많은 이자카야가 존재한다. 일본어를 전혀 할 수 없었던 십여 년 전에 일본을 여행하면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었던 유일한 곳이 이자카야였다. 물론 지금이야 일본어를 모르더라도 사진을 손가락으로 쿡 찍어가며 주문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때는 일본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 의사소통을 하는 일에 지레 겁을 먹고 언제나 밖에서 구경만 했었다. 그러다가 일본에 살게 되면서 친구들과 가기 시작했고 차차 소소한 삶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됐다.
품질 좋은 삿포로 맥주는 당연하게도 삿포로 도처의 이자카야에서 취급하고 있었고 삿포로 맥주와 야키토리, 야키니쿠는 정말 잘 어울렸다. 돈이 별로 없던 유학생 시절,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친구들과 둘러앉아 야키토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들이켰던 삿포로 맥주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일본인들도 이자카야에서는 와글와글 떠들며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즐긴다.
말 많고 탈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놀이터가 되어주고, 일상이 고단한 샐러리맨들에게는 스트레스 해소의 장소가,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에게는 이색적인 경험을 주는 삿포로의 이자카야 세 곳을 소개한다.
늘 그렇지만 내가 이야기하는 가게들은 삿포로에 살면서 들락거린 평범한 곳이다. 물론 대단한 맛집들도 존재하고 몇 군데 다녀오기도 했지만 애정이 가고 이야기가 생기는 곳들은 희한하게 그런데들이 아니었다.
짧은 기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임팩트 있고 특별한 곳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재미있고 들러보고 싶은 곳 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평범할 뿐인 곳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특별한 맛집의 관점이 아닌,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가게의 관점으로 보아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