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르신'의 독백-8
수년 전 아내하고 거래은행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민 올 때 계좌를 개설하여 아직까지 거래하고 있는 주거래은행이다. 당시 그 은행에는 한인 이민자들 위주로 상담과 계좌관리를 해주는 부장급 한인 직원이 있었다. 우리 부부와 비슷한 연배의 여자분이었다. 워낙 오랜 기간 만나온 터라 방문할 때마다 은행 볼일보다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얘기를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는 했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분이 먼저 자기 남편의 건강 관련 얘기를 꺼냈다. 자기 남편이 갑작스럽게 심장 수술을 받았는데 병원 방문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뻔했다는 얘기였다. 매우 위급한 상태로 병원에 갔는데 다행히 수술이 잘돼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위급상황을 겪게 된 것은 순전히 남편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의사검진을 받아보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도 무관심하더니 결국 때를 놓치고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편의 의사기피증을 비난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남자들은 왜 병원 가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의 마지막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아내가 대꾸했다. '우리 남편은 정반대예요.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의사검진을 자주 받아서 문제거든요. 몸 어딘가 조금만 이상증세가 느껴지면 무슨 큰 병이라도 난 것처럼 걱정을 하고 무조건 의사를 만나려고 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어요'라고.
아내는 이처럼 의사 만나는 것을 밥 먹듯 하는 나를 건강염려증 Hypochondria 환자로 치부한다. 즉 멀쩡한데도 큰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걱정하는 일종의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매년 정기적으로 혈액검사를 할 때마다 전혀 문제가 없고 특히 당뇨 비만 고혈압 등 소위 성인병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괜히 엄살을 부린다고 비난한다. 이제는 내가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걱정해 주기는커녕 핀잔부터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런 아내가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내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의사를 만나거나 이런저런 검사를 받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최근 들어 한 달에 서너 번씩 훼밀리닥터 오피스를 비롯해 각종 클리닉을 방문했다. 지난달에는 훼밀리닥터 검진, X-ray 및 Ultra sound촬영, 혈액검사 등을 위해 다섯 번이나 해당 클리닉 또는 닥터오피스 등을 다녀왔다. 셀폰의 월별 스케줄표에 잡혀있는 일정의 90% 이상이 건강체크 관련 일정이다. 그런데 아내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나를 Hypochondria 환자취급하는 것은 단지 닥터 만나는 횟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닥터진료 결과가 대부분 별다른 이상이 없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내가 나더러 '신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정신에 문제가 있다'라고 핀잔하는 것도 그래서다.
지금까지 종합병원 응급실(ER)을 두 번 다녀온 경험이 있다. 4년 전 그리고 올해 각각 한 번씩 다녀왔다. 그런데 두 번 모두 의사들로부터 '특별한 이상증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캐나다의 병원 응급실은 항상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장시간 기다려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놓다. 그것은 의사를 만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급한 환자들이 응급실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밴쿠버의 경우 의사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훼밀리닥터를 만나려면 보통 한 두 달 기다려야 하고 전문의 Specialist를 만나려면 6개월 이상 기다리는 게 보통이다. 또 종합병원은 훼밀리닥터나 전문의의 리퍼럴이 없으면 아예 갈 수가 없다. 병원 응급실이 항상 환자들로 미어터지는 이유다.
4년 전에는 갑자기 목이 아파 음식뿐 아니라 침을 삼키기가 고통스러워 응급실을 찾아갔다. 꼬박 6시간을 기다려 의사 진료를 받았다. 기다리다 지쳐서 진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이미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참고 계속 기다렸었다. 진료시간은 30분 정도였다. 진료를 한 ER닥터가 '심각한 상황은 아닌데 전문의한테 리퍼럴할테니 만나보라'고 했다. 며칠 뒤에 전화를 받고 이비인후과 ENT전문의를 만났다. 응급실에서 리퍼럴을 했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전문의를 만난 것이다. 그 ETN닥터 역시 특이증상이 없다며 이번에는 목(인후) Throat 전문의한테 리퍼럴을 해주었다. 그 전문의의 진단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목통증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응급실 방문은 지난 4월이었다. 갑자기 복부에 통증이 느껴지고 음식물 섭취가 어려워졌다. 음식을 입에 대면 거부반응이 일었다. 증상이 3일째 이어지던 날 금요일 오전 아내와 함께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다. 평소 응급실답지 않게 등록창구가 비교적 한산했다. 접수를 받는 간호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어제는 밀려든 환자들로 북새통이었는데 오늘은 연휴가 낀 주말이어서 비교적 한산하다'고 했다. 연휴에 놀러 간 사람이 많아 응급실 환자도 적다는 말인데 그 말인즉 평소 응급실에 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런 날인데도 의사 진료와 복부 CT를 찍고 결과를 보는 데까지 5시간이 걸렸다. CT판독결과는 '정상'이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아내가 응급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더니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별것 아니라고 하지?' 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돌아오며 아내로부터 내가 Hypochondria환자라는 말을 또 들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아내한테 비난을 받으며 나는 왜 늘 건강문제에 과잉반응을 하는 것일까. 우선 성격 탓이 크다. 무슨 일을 하든 빈틈없어야 만족하는 성격이다. 준비성이 강해서 어떤 일이든 미리부터 준비를 철저히 해야 직성이 풀린다. 시간관념이 뚜렷해 약속장소에 미리 도착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다 보니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한다. 무슨 일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일이 잘못될 경우를 자꾸 떠올리는 것이다. 나와 정반대로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내와 정반대다. 의사를 자주 찾아가는 가장 큰 이유도 병이 커지기 전에 미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때문이다.
내가 Hypochondria 환자소리를 듣는 또 하나의 이유는 캐나다 의료시스템과도 무관하지 않다. 각 주정부에 의해 관리되는 캐나다 의료시스템은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무료로 치료를 받는 공공의료시스템이다. 돈 많은 부자든 돈 없는 가난한 사람이든 똑같은 서비스를 무료로 받는 구조다. 문제는 정부가 의료서비스 관련 예산 및 인력을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의료서비스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고 의사도 부족하다 보니 필요할 때 의사를 만나 진료를 받기가 무척 어렵다. 내가 수년 전 어깨 수술을 받을 때 훼밀리닥터를 만나는데 1개월 이상, MRI 찍는데 6개월, 훼밀리닥터 리퍼럴에 의해 정형외과 전문의 Orthopedic surgeon 처음 만나는데 6개월, 수술대기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 어깨 수술 한번 받기 위해 1년 반이상 기다린 셈이다. 장기간 기다리느라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한번 수술을 받고 나서 결국 재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된 심한 통증이나 심리적 부담감 등을 생각하면 그건 악몽과도 같았다.
이렇게 의료서비스 접근성이 떨어지는 의료제도하에서 귀찮고 힘들지만 건강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가능한 한 빨리 적극적으로 의사를 찾아가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게 해도 원하는 때 의료서비스를 받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내한테 자주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지금은 병원에 자주 가지만 내 나이 80이 넘으면 더 이상 병원을 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인명재천 人命在天이니 장담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희망수명을 80까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이 아파도 병원 가길 싫어하는 거래은행의 부장님 남편보다는 사소한 건강문제라도 의사를 찾아가 미리 상태를 확인하는 내 방식이 결과적으로 아내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 계속해서 아내로부터 내가 Hypochondria 환자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