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노인들의 초상

어느 '어르신'의 독백-10

by 주호석

팬데믹으로 외출이 어려웠던 때였다. 어느 한인단체에서 주관하는 노인 건강 관련 온라인 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다. 강사는 은퇴한 의사였다. 강의 내용 중에 노화과정에서 겪게 되는 호르몬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요지는 나이가 들면서 여성은 여성호르몬 분비가 줄어드는 대신 상대적으로 남성호르몬 분비가 증가하고 남성의 경우는 그 반대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여자는 나이가 들면서 남성성이 강해져 성격도 거칠어지는 반면 남자는 오히려 연약한 성격으로 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의 남성호르몬 분비가 과도하여 성격이 지나치게 과격해질 경우 부부사이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심할 경우 가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상황으로 발전하기도 한다는 설명이었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노인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그 의사의 지적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변에서 성격 변화로 인해 부부관계가 파탄에 이른 경우는 보지 못했지만 남자 중심으로 유지되던 부부의 삶의 패턴이 여자중심으로 바뀌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인들의 성격이나 행동에 변화가 오는 게 꼭 호르몬 분비의 차이때문만은 아닐 게다. 나이가 들면서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생활패턴이나 심신의 변화가 영향을 줄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젊은 시절 밖에서 경제활동에 전념해 온 남자들은 나이 들어 맞이하게 되는 은퇴와 함께 대외활동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부부사이에도 크고 작은 역할 변화가 불가피해지는데 그런 경우 대개 남자는 집안팎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여자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일반적이다. 젊은 시절 주로 밖에서 활동하던 남자들의 경우 익숙지 않은 집안일이 서툴러 그럴 수도 있을 테고 직장에서 많이 시달렸던 사람은 만사가 귀찮아 매사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지도 모른다.


일례로 주일에 성당에 가면 남성에 비해 여성신도가 훨씬 많다. 나이 든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부부가 함께 미사에 참석하지만 혼자 참석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대개 여성신도들이다. 성당에서 만나 아내가 가깝게 지내고 있는 한 여성신도는 '남편이 함께 미사에 참석했으면 좋겠는데 고집불통이라 설득이 안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집들은 나이가 들면 여자가 하자는 대로 남편이 따라온다는데 우리 집은 그게 안된다'며 아쉬워했다. 가족단위로 볼 때 종교활동에 있어서도 남자보다 여자들이 보다 적극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다.


내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크고 작은 집안일은 물론이고 종교활동이나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거의 아내 주도로 이뤄진다. 외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거나 밖에서 모임을 가질 때도 아내 지인들과 관련된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은행 관련 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에어컨 설치나 정원을 새로 꾸미는 일, 가구등 생활용품을 새로 장만할 때도 대부분 아내의 의견에 따라 결정된다. 가끔 아내의 선택이 맘에 안들어 내가 토를 달아보지만 결국 아내 뜻대로 결론이 나고 만다. 이제는 의견이 안 맞더라도 충돌을 피해 내가 먼저 양보를 하는 게 일상화되었다.


이렇게 집안팎에서의 활동이나 의사결정에 있어서 아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보니 내 삶 자체가 아내의존형으로 굳어져가고 있다. 그런 현상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아내가 없으면 노년의 삶이 막막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아내가 나보다 오래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나의 모습이 가끔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인 데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서 위안을 얻고는 한다.


어디선가 읽은 글 한 구절이 떠오른다. 부부가 백세를 넘긴 노부부의 이야기다. 남자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내는 물이고 나는 물고기야. 물은 물고기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지만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는 거야'라고. 백 년 넘게 살아오면서 터득한 그 노인의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며칠 전 자주 만나는 지인과 산책을 하다가 내가 '아내가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지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건 모든 노인 남자들의 로망이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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