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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tle Latte 젠틀라떼 Nov 29. 2018

[퇴사일기 #2] 슈퍼맨은 없다

나 역시 슈퍼맨은 될 수 없다

  S사의 퇴사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직무 변화였다. 홍보로 커리어를 쌓아온 나에게 회사는 경영기획 업무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경력직으로 입사한 지 5개월 만의 일이었다. 회사와 나를 둘러싼 상황은 복잡했다. 홍보와 마케팅을 강화하겠다며 나를 채용한 CEO는 고문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고, 몇몇 프로젝트에 리스크가 확인돼 실적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새로 부임한 경영진은 시급한 현안을 챙기느라 홍보는 안중에 없었다. 전임 경영진 역시 인사발령을 앞두고 본인의 거취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2개월 넘도록 일이 없었다. 가끔씩 영업사원들에게 회사 기념품을 챙겨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입사 후 공들여 준비한 중장기 홍보전략은 실행은커녕 보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캐비닛에 던져졌다. 홍보팀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경영기획팀 내에서 홀로 홍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바쁜 동료들 사이에서 나 혼자 멍하니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말 그대로 좌불안석이었다. 일이 없다는 것은 잠깐의 즐거움일 수는 있으나 길어질 경우 큰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경영지원본부장이 나를 불러 경영기획 업무를 제안했다. 본인을 비롯해 그룹 내 어떤 임원들처럼 성장할 수 있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홍보업무도 당장 손에서 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병행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고민을 했다. 만약 홍보 업무만을 고수한다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지 불확실했다. 광고선전비를 대폭 삭감하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역할을 하는 게 맞는지, 그렇다면 커리어를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하는지, 잘 해낼 수 있을지 등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국 홍보와 경영기획 업무를 병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한동안은 언론기사 모니터링을 한 후 경영실적 회의자료를 만들고, 예산관리를 하다가 보도자료를 쓰는 등 멀티 플레이어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 점차 홍보는 손에서 놓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영기획 업무만으로도 한 달의 반은 야근을 해야 할 정도였다. 매달 회장에게 보고하는 실적회의자료를 제출하는 주간에는 새벽 늦은 시간에 마지막으로 사무실 조명을 끄고, 당직실에서 주무시는 청경 아저씨를 깨워 건물 현관문을 나서곤 했다. 윗선에선 홍보에 관심도 없고 예산도 없었다. 그저 광고선전비를 안 써 연간 이익이 개선될 거란 기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힘들고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업무량이 많아서 힘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홍보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만도 아니었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새로운 업무에 즐거움을 느꼈다면 커리어 플랜을 다시 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나의 역량 부족이다. 8년 가까운 직장생활 동안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짜 오다가 갑자기 숫자를 다루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긴장을 해서인지 처음엔 사칙연산을 헷갈리기도 했다. 업무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실수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던졌다.


  겉으로는 유해 보이지만 자존심이 강했기에 이를 악 물고 버텼다. 믿고 맡겼는데 실망이라는 평가를 듣기 싫었다. 잘 해낼 줄 알았다는 말을 들어보자고 다짐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고,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쓴 몸부림이기도 했다. 힘든 내색도 않으려 노력했다. 회식 때면 ‘누구나 힘들어’ 또는 ‘나때는 더 힘들었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렵고 힘이 든다는 것에는 절대적인 기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르다. 가치관에 따라서도 다르고 성격이나 체력, 생활환경에 따라서도 다르다. 나에게 쉬운 것이 남에게는 어려울 수 있고, 남에게 어려운 것이 나에게는 쉬울 수도 있다. 슈퍼맨은 없다. 모든 것을 다 잘 해내고 싶은 것은 욕심이다. 내가 경영기획 업무를 하며 실수를 하고 헤매었던 건 그 분야에 대한  경험과 역량이 부족해서이지 못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작아질 필요가 없었다. 이것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업무가 즐겁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비합리적인 업무체계였다. 매뉴얼은 문서상으로만 존재할 뿐 업무를 추진하는 프로세스와 내용은 전적으로 임원의 뜻이었다. 실무진이 전략이나 자료를 준비해 가도 임원 한 사람의 생각이 답이었다. 그저 깨지면서 배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임원이 업무를 총괄하며 실무진을 이끌어가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끈다는 것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CEO에서부터 사원까지 직급이 나뉘는 것은 각각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부하직원들을 모두 앉혀놓고 보고서의 마침표 하나하나까지 지시를 내리는 것이 디테일 경영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임원까지 승진하는 동안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바를 후배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선을 지켜야 하는지를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비단 임원뿐만 아니라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사원 등 각 직급에서 각자의 역할이 어떤지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업무의 체계가 잡히고 원활히 돌아간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 부서 간에도 협업하고 빌드업해나가는 시스템이 미흡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감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업무영역이 중복되는 팀들도 있다 보니 서로 견제가 심했다. 영업부서의 자료를 참고하려면 담당자 자리를 찾아가 사정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어렵게 받은 자료의 데이터가 사실과 다른 경우도 많았다. 매출실적이 목표에 미달한 프로젝트가 있으면 문제를 감추기 위해 초과 달성한 프로젝트의 매출을 일부 가져오는 식이었다. 엑셀로 하는 일종의 숫자 조작이다. 이런 경우 전체 합은 회계 상의 실적과 동일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별로 세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못된 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일부 영업직원은 경영기획팀에서 못 알아내면 좋고 알아내도 그만이라는 태도였다.


  기밀이 아닌 이상 사내에서 정보의 공유와 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조직문화의 문제다. 회사의 비전과 일하는 방식이 불확실하거나 정확히 전달되지 않으면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러면 내부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길뿐더러 윤리경영에도 금이 간다. 부서가 구분되어 있는 것은 조직과 업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거나 관리하기 위함이지 서로 간의 벽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다. 과거 1%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회자됐었지만 이제는 집단지성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 정설이다. 서로 긴밀하게 소통하며 협업해야 한다.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최고의 인재를 선발하되 그들이 혼자 일하도록 두지 않는다. 업무시간의 일부를 할애해 동료와 협업하도록 강제하는 기업들도 있다. 이기적인 개인들의 노력이 당장 눈앞의 실적은 달성해낼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 가능한 경영환경은 만들지 못한다. 혼자 일하며 무한히 성과를 내는 슈퍼맨은 없다. 있다면 굳이 회사에 다니지 않을 것이다.


  슈퍼맨은 그저 만화나 영화에만 등장하는 존재다. 나도, 그 누구도 슈퍼맨이 아니며 슈퍼맨이 될 수도 없다. 슈퍼맨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안주나 태만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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