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낳괴(가난이 낳은 괴물)

선명해져만 가는 가난의 기억

by 순한 사람

병원생활이 길어지면서 할머니는 시간 감각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손녀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조금 전까지의 꿈과 섬망, 상념이 뒤섞여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간밤 고약한 꿈을 꾼 날에는 더 그랬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먼 옛날 할아버지의 후첩으로 들어간 사직동 골목집인 것도 같다가, 혼자되어 5남매와 웅크려 자던 홍제동 단칸방인 것도 같은가 보다. 간병인을 주인아줌마라고 부르다가, 어멈이라고 부르다가,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극심한 시간여행의 부작용은 끝없는 허기와 물욕이다.

무능하고 폭력적인 할아버지 밑에서 갖은 고생을 했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어느 날 ‘풍’을 맞아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신 뒤로 음식장사를 하며 5남매를 홀로 키워냈다고 한다. 지독한 가난과 고된 노동의 기억 탓에 할머니는 쌀밥, 고기, 돈에 대한 유난스러운 집착이 있다. 옷가지(특히 겨울옷)이나 휴지에 대해서는 거의 저장강박증 환자 수준이다. 입원 전부터도 꼭 한쪽에 두루마리 휴지를 쪼르륵 쌓아놓곤 했는데, 병원에 온 뒤로 집착이 점차 심해져 코 푼 휴지 한조각도 꼬깃꼬깃 구겨 허리춤 밑에 끼워 넣어 놓곤 한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에는 내게 귓속말로 ‘용돈’을 달란다.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성치 않은 몸을 하고서도 최후의 기댈 곳은 ‘돈’ 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는 나와 이야기하던 중 잠시 딴청을 하다가 ‘네 남편은 돈 잘 버네?’하며 나름대로 머리를 써 ‘운’을 띄우곤 한다. 그 속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응 나 돈 많아. 할머니 좀 줄까?’하고 물으면, 허리춤 밑에 넣어놓은 비단 동전지갑을 몸을 요리조리 돌려 꺼내며 ‘10만원만’ 하고 애처롭게 쳐다보곤 한다. 그렇게 지금까지 뜯긴(?) 돈이 100만원은 족히 되는 것 같다.


때로는 자신이 가진 하찮은 것을 빼앗길까 벌벌 떨기도 한다.

얼마 전, 손목시계를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숫자판이 큰 만 원대의 노인용 손목시계를 구입해 채워준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시계를 다른 사람이 훔쳐갈까 두려워 며칠 동안 손을 이불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잠까지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끙끙 앓던 할머니는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몸이 성치 못해 도둑을 만나면 속수무책이라며 울먹이는 얼굴로 시계를 다시 내어줬다. 자기 방에 잘 뒀다가 나으면 달라는 말과 함께...


무엇으로든 할머니의 결핍을 메울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이 대부분 그렇듯 할머니 인생에도 추위와 배고픔이 인이 배겨있는 것 같다. 매일 먹이는 흰쌀밥과 고기반찬, 오만원자리를 욱여넣어 두둑한 동전지갑으로 할머니의 상처를 달래 보려 하지만 아마 그 무엇으로도 쉽지 않을 듯싶다. 오늘도 나는 그저 안쓰럽고 서글프기만 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9. 왜 또 비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