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손톱에 꽃물

할머니는 여전히 손톱 꾸미기를 좋아한다.

by 순한 사람

어린 시절 할머니는 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며 웃었다.

여름이면 어딘가에서 봉숭아 꽃잎과 백반을 구해와 '예쁘게 해 주겠다'며 나를 불러 앉혔다. 손톱 위에 찧은 꽃잎을 올려 비닐봉지로 감싸고, 노랑 고무줄을 칭칭 동여맨 채 꼬박 하루 밤을 기다리면 진한 꽃물이 들었다. 나는 자다가 손끝이 답답하고 근질거려 할머니를 자주 깨웠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내 손끝을 젓가락으로 콕콕 눌러주곤 했다. 나중에는 할머니의 물들이기 방법이 점차 발전해 손톱 주변 살이 물들지 않도록 찧은 꽃을 올리기 전에 ‘콜드크림’을 발라 주기도 했다.


겨울에는 시장에서 매니큐어를 사다가 서로 발라주었다.

할머니는 분홍빛의 투명 매니큐어를 가장 좋아했는데, 뭉툭한 내 손톱을 덮고 있는 거스러미들을 살살 밀어내고 분홍빛 매니큐어를 발라 주었다. 나 역시 서툰 손끝으로 할머니에게 발라주었는데, 매번 양 조절에 실패해 얇았다가 두꺼웠다가 울퉁불퉁했지만 할머니는 불평이 없었다. 당시 시장통에서 팔던 매니큐어는 질이 변변치 않아 말리는데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할머니와 나는 마주 앉아 손끝을 호호 불어가며 기다렸고, 다 말랐는지를 확인하려다 매니큐어에 지문이 찍히거나 먼지가 묻기 일쑤였다.


옛날 생각이 나서 병원으로 가는 길에 분홍색 매니큐어를 하나 샀다.

‘할머니 발라주려고 사 왔어!’ 하며 눈앞에 병을 흔들었더니 할머니 눈동자가 커졌다. 처음에는 ‘에잉~ 시커먼 손에 무슨 매니큐어야’며 머뭇거리더니만, ‘그럼 엄지만 한번 발라봐’라며 못 이기는 척 손을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축 처져 있는 왼손에까지 열 손가락을 꼼꼼히 발라주었다. 예전보다 오그라들고 손등은 검버섯이 빼했지만, 손톱만큼은 어린 시절 보던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침상 테이블에 양손을 올려놓고 마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1분이면 마르는 요즘 매니큐어인데도, 안 말라서 지문이 찍힐까 봐 2분 3분을 한 자세로 있었다.


분홍 매니큐어가 또 한 번 인기를 끌었나 보다.

다음날 할머니는 ‘사람들이 손톱이 좋아 빈대(보인대)~’하면서 싱긍벙글해 했다. 간호사들과 물리치료사들이 분홍 매니큐어를 보고 좋은 이야기를 해 주었나 보다. 할머니가 아프기 전엔 몰랐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이벤트,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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