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또 한 번의 도전, 파마

할머니는 머리 볼륨을, 나는 삶의 용기를 얻었다.

by 순한 사람

지난 토요일, 묵은 체증처럼 걸려있던 숙제를 이젠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시도 때도 없이 ‘파마하러 가자’고 졸랐다. 몇십 년간 해오던 뽀글이 파마를 못 하게 되니 왠지 벌거벗은 사람처럼 외모에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간병사가 들이미는 ‘바리깡’을 강력히 거부하다가 결국 쑥대밭이 된 머리칼 끝을 잡아당기며 우울해하기도 했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꽃분홍 머리핀을 꽂아주고 ‘머리 길면 꼭 파마를 시켜줘야겠다’고 별렀던 터였다.


파마라는 것이, 그리 간단치는 않은 일이었다.

허리를 곧게 펴지 못하는 할머니가 휠체어에서 2시간 이상을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거니와, 미용실의 머리 감는 장치는 몸 여기저기가 굳은 환자에게 매우 부적합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용하던 시설들이 할머니의 눈으로 보니 모두 거대한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와상 환자를 파마시키겠다고 덤비는 내가 이상한 거지’하며 스스로를 달래면서, 그나마 공간이 여유로우면서 ‘너무 힙하지 않은’ 분위기의 적당한 일인 미용실을 찾아냈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당일의 스케줄과 최적의 동선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결전의 날’에 대비했다.


‘파마하러 가자’ 소리에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화색이 돌았다.

마스크, 수건, 모자, 쿠션... 챙길 짐만 한가득이었다. 롯드를 말고 기다리는 동안 근처 식당에서 식사도 해야 했기에 턱받이와 물티슈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오늘따라 휠체어에 앉는 할머니 표정도 왠지 비장해 보였다. 병원 간호사와 간병사들은 짐을 가득 짊어지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우리가 파마를 하러 간다는 사실을 듣고는 ‘저런 집은 정말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


우리는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미용실에 들어서서도 우리는 간호사들의 얼굴에서 봤던 놀라움과 약간의 당혹한 표정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래도 미용사는 몇 초 만에 ‘자신 있다’는 듯 할머니를 안쪽으로 안내하며 프로다운 면모를 보였다. 할머니는 투정 한번 없이 2시간 이상의 지루한 파마 작업을 묵묵히 버텨냈다. 막판에는 지쳐 침까지 무방비로 흘리면서도, ‘그만하고 돌아가겠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나와 엄마는 할머니의 허리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 연신 자세를 고쳐 앉히고, 숨이 턱에 찰 정도로 휠체어를 밀었다. 갖은 고생 끝에 우리는 뽀글이가 된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병원에 돌아올 수 있었다.


기상천외한 도전과 성공의 경험들이 점차 내 인생관을 바꿔놓고 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병상에 누워 “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뻐!!”하며 흡족해하는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뿌듯함과 함께 이상하게도 막연한 용기가 솟아났다. 할머니 덕분에 남이 가본 길, 검증된 길만 걸어온 내 인생에 기분 좋은 변주가 발생하는 것 같다. 힘들고 곤란해 보이더라도 일단 시작하면 반드시 방법이 보인다. 예상치 못한 도움의 손길도 만날 수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부딪치라고, 오늘도 할머니는 몸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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