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봄, 감기

산뜻한 봄바람에도 시린 기가 남아있었나 보다.

by 순한 사람

겨우내 병실 밖을 나가지 않았던 할머니에게 빨리 봄 내음을 맡게 해주고 싶었다.

“두러 누워있는 게 시상에서 젤 편해~” 하며 떼를 쓰는 할머니를 어르고 달래 평소 즐겨 입던 꽃무늬 카디건을 입히고, 서둘러 휠체어에 태워 병원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벌써 흙을 밟는 느낌, 바람 냄새, 물 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총총거리며 휠체어를 밀었다. 초보 간병인인 나는 환자를 움직일 때에는 부지런한 것보다 게으른 것이 낫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손녀가 등뒤에서 재잘거리는 동안 갑작스런 바깥공기에 눈물 콧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있었다.


결국, 할머니는 감기라는 놈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산책을 다녀온 이튿날부터 열이 오르더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가래 끓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눈 코 입에서 진득한 액체가 무방비로 흘러나왔고, 눈빛도 흐릿해져 ‘할머니’하고 불러도 막연히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이불속에 손을 넣어보면 후끈후끈하는 열기가 마치 사우나에 온 듯했다. 열이 심한 날은 밥을 입에 떠 넣어주어도 입을 다물 힘도, 씹을 힘도 없어 밥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매일 그렇게 몇 시간씩 끙끙 앓다가 피로감과 약기운에 지쳐 까무룩 잠이 들길 반복했다. 의사는 폐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시기라고 했다. 짧은 봄 소풍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올 줄이야!!!


설상가상으로 할머니 몸에서 흘러나온 바이러스들이 병실을 돌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앓기 시작한 지 사흘쯤 지났을까, 옆 침상 할머니께서 가래 끓는 기침을 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더니 며칠 가지 않아 온 병원이 감기 환자들로 난리였다. 샤워실 문은 굳게 닫혔고, 환자들에게는 모두 마스크를 씌웠으며, 가족 방문시간도 제한됐다. 병원이 한순간 어두컴컴해진 느낌이었다. 긴 복도 끝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모퉁이를 돌아가면 저승사자가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후회와 죄책감에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병실 가족들은 불평 하나 없이 이 전쟁을 함께 치렀다.

병실 할머니들, 할머니들의 가족들도 누구 하나 원망하거나 짜증 내지 않고 그 시간을 견뎌 냈다. 간호사님들도 익숙한 듯 묵묵히 제 일을 하실 뿐이었다. 옆 병상의 ‘할머니 애인’(양금희 할머니)는 가족면회 제한으로 한 달에 한번 오는 아들내외조차 만나지 못했지만,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봐 주셨다. 건너편 병상의 ‘공 할머니’(매일 공 두 개를 손에 꼭 쥐고 계셔서 공할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역시 가르랑가르랑하는 목소기로 가끔씩 구성진 노랫가락을 내뿜으셨다.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 할머니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앓던 내내 아무 말이 없더니, 며칠 만에 눈을 또릿하게 뜨고는 “아유 죽겄다!”하고 말문을 다시 열었다. 죽겠다는 말이 꼭 살겠다는 말로 들려, 기쁨과 안도감에 쿡쿡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병실 할머니들도 속속 말문을 트면서 서로에게 생존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덧 날은 더욱 따듯해져 병원 복도가 봄날 오후의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할머님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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