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방향이 바뀐 사랑에 대하여
모든 만남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고 했던가.
나와 아내는 같은 야학에서 교사로 알고 지내던 형과 처형이 주선한 소개로 처음 만났다. 나는 대학교 4학년, 아내는 3학년 진급을 앞둔 2월이었다. 벌써 40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라 이제는 그날의 기억도 많이 희미해졌다.
첫 만남의 장소는 서울 동숭동에 있던 ‘오감도’라는 찻집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곳은 마침 외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영업을 안 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들어선 안에는 아내와 처형, 형이 이미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을 저렇게 해놓고도 영업을 하는 게 신기하네요.” 무심코 던진 나의 첫마디가 아내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나 보다. 훗날 아내는 그 말이 참 신기하게 들렸다고 회상하곤 했다.
형과 처형은 간단히 소개만 시켜주고 자리를 비켜주었고, 우리 둘은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느 소개팅처럼 서로에 대한 개략적인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졌지만, 분위기는 비교적 편안했고 말도 잘 통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근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오무라이스를 대접했고, 헤어질 때는 집에 가라며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걸어주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으니, 그 점이 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동안 학교 동아리나 미팅에서 만났던 남자들은 만남을 질질 끄는 느낌이 있었는데, 나는 깔끔하게 만남을 마무리한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물론, 다음을 기약하는 ‘애프터’ 약속은 잊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아내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모양이다.
두 번째 만남은 약 일주일 뒤, 신림동의 한 다방에서였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도착했다.
사실 일주일 전에 한 번 본 여자 얼굴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 입구로 들어서는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30분이 지나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서너 번쯤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다시 앉기를 반복한 끝에, 아내가 마침내 들어왔다. 왜 늦었는지 이유는 이제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어쨌든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한 가지 후일담이 있다. 나중에 아내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첫 만남 전날, 끼고 있던 콘택트렌즈를 소독하려다 실수로 태워버려 렌즈 없이 나를 만나러 나왔다는 것이다. 몇 번 더 만날 때까지도 렌즈 없이 나와서, 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나중에 렌즈를 끼고 나를 보니 여드름 자국이 꽤 많더란다.
“처음부터 그걸 봤으면 애프터 안 했을지도 몰라.”
아내의 농담에 함께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눈멀었던 순간조차 다 운명이었으리라.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집에 데려다주며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실어 잡은 여자의 손이었다. 따뜻했다.
그 후로 첫 포옹, 첫 입맞춤, 첫 결혼, 첫 출산...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에는 모두 ‘첫’이라는 단어가 별처럼 박혔다.
캐나다에서 21년을 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아내에게 병이 찾아왔다. 병세가 기대만큼 호전되지 않으면서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그렇게 빨리 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완쾌는 어렵더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아내와 이별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삶의 갈피마다 ‘첫’이 아니라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소리 없이 붙고 있었다는 것을.
‘아, 그것이 마지막이었네...’
마지막 여행, 마지막 명절, 마지막 생일, 마지막 산책, 마지막 외식, 마지막 입원, 마지막 문자, 마지막 대화, 마지막 선물, 마지막 입맞춤...
입관식에서 관 뚜껑을 닫기 전, 나의 마지막 선물인 보라색 스카프를 두르고 누워 있는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며 잠시뿐인 이별을 고했다.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며 닿은 아내의 입술은 차가웠다.
얼마 전,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42년 전 처음 만난 날부터 이별하던 날까지, 우리는 매일 그 이별을 향해 걸어왔기에 함께할 시간은 매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내와 이별한 순간부터 다시 만날 그날까지는, 매일 재회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떨어져 있는 시간 또한 매일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이 생각이 들자 슬픔은 고요해지고, 남은 생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다시 만나기 위해 방향만 바꾼 여정일 뿐이었다.
오늘 아침도 나는 아내에게 안부를 건넨다.
“여보, 다시 만날 날이 어제보다 하루 더 가까워졌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지냅시다.
그때는 우리, 그 수많은 ‘첫’ 경험들을 다시 함께 합시다.”
#처음 #마지막 #다시 #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