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의 정원지기
지난달, 주말을 이용하여 집안 수돗가 옆 공터에 깔려있던 쇄석을 모두 걷어내고 텃밭으로 만들었다. 꼬박 이틀이나 걸린 작업이다. 그동안 ‘놀고 있던’ 땅에 우선 유기질 비료와 유박, 계분을 충분히 뿌려 씨와 모종이 성장할 옥토를 만드는 일에 세심한 정성을 기울였다. 이들 성분이 땅속에서 충분히 숙성되가를 기다린 뒤, 여린 배추 모종을 심었다.
유난히 무더위가 오래가는 올여름, 이들 여린 모종이 뜨거운 햇살과 무더위에 과연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걱정도 있었지만, 여린 모종에서 튼실하고 속이 노랗게 꽉 찬 김장배추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정성껏 심고 아침저녁으로 둘러보며 물을 흠뻑 주었다. 아내도 어린 배추에게 애정을 담아 말을 건네주곤 했다. 2주가 지난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싱싱하고 파란 잎으로 성장하고 있다.
텃밭을 조성하고 여린 모종을 심고 가꾸는 내내 내 마음속에서 떠오른 것이 있었다. 로아 양육이었다. 정성과 애정으로 텃밭을 일구고 모종을 가꾸는 일이 아기 양육과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텃밭 가꾸기와 할아버지의 로아 양육이 만난 것이다.
요즈음 읽고 있던 책에서 나의 시선을 끄는 그림이 하나 있다. 처음 보는 그림이지만 책을 덮고 나서도 그림 영상이 자꾸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책을 열고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예르의 카유보트 소유의 정원>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 화가는 모네와 함께 활동했던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한국에서 기획전이 열리기도 했다. 이 그림의 구성과 내용은 단순하다. 저 멀리 남부 프랑스풍 전원 저택 앞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이 들어서 있다. 그림 왼쪽 한켠에는 정원을 함께 걷고 있는 할아버지와 손녀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그림에서 내 시선과 마음을 빼앗은 것은 두 사람의 뒷모습이다.
멋진 장식 모자에 예쁜 원피스 차림의 소녀는 뒷모습만으로도 귀엽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역력하다. 소녀를 앞세우고 한 발 뒤에서 걷고 있는 할아버지는 외출복이 아니라 평상복으로 보이는 소박하지만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약간은 구부정하지만, 인자하고 기품 있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소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정원과도 참 잘 어울린다. 소녀와 정원은 단순한 감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정성껏 가꾸고 돌보는 마음이 할아버지 뒷모습에 잘 드러나 있다.
화가 카유보트는 정원 가꾸기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으며, 모네와도 정원에 관한 정보와 의견을 수시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가난한 화가들을 돌보고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죽으면서는 그림에 나오는 예르의 정원을 비롯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고 한다. 화가와는 달리 <예르의 카유보트 소유의 정원>에 대한 설명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카유보트 소개 사이트에 올라온 대표작에도 이 그림은 등장하지 않는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던 화가의 삶과 그림 제목을 단서로 유추해본다면, 그림 속 저택과 정원은 화가 자신이 소유했던 것으로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는 화가로 보인다.
이 그림에서 내게 풀리지 않는 의문은 손녀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의 정체다. 화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미스터리가 때론 좋다. 해석의 여지를 항상 열어두기 때문이다. 이 소녀의 정체가 미스터리로 남겨진다 해도 이 그림을 보고 느꼈던 애초의 나의 인상과 감정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가든 가꾸기와 할아버지의 손녀 돌보,’ 새로운 텃밭을 일구며 느꼈던 것처럼, 이 그림에서 순간적으로 내가 받은 인상과 감정의 정체다. 사람의 시선은 선별적으로 자신이 관심 있는 것만을 골라본다고 한다. 이 그림을 이전에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그림이 지금 내 시선을 끈 이유는 나 스스로 텃밭 정원 가꾸기와 손녀 돌봄 둘 다를 하고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깊은 연결성을 실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농장 2년에, 현재의 주택에 딸린 텃밭 정원 가꾸기 6년째다. 정성껏 텃밭을 일구고 가든을 가꾸어 쌈채와 농작물, 과일을 수확하는 즐거움은 무척 크다. 이 수확의 즐거움과 기쁨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과정에서 이미 시작된다. 땅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주는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비록 정원은 황량해 보이지만,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모든 것들의 씨앗이 땅속에서 꿈꾸고 있으며 상상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채소밭은 생명이 충만해져서 반짝이는 푸른빛을 띤 상추들이 자랄 것이다.’
표현할 재주가 미천한 탓에, 텃밭 정원 경험을 젊은 시절 탐독했던 헤르만 헤세의 표현에 기대본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듯 보이는 텃밭 정원, 그 안에 심어진 씨앗은 “땅속에서 꿈꾸고” 있으며, 텃밭 정원을 가꾸는 나는 그 씨앗의 충만한 생명과 풍성한 결과물의 모습을 "상상 속에" 그려내면서 씨앗이 제대로 싹트고 결과물로 맺도록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다.
로아로 인해 나의 텃밭 정원 가꾸기는 육아 행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생명이 충만한 씨앗"은 아기이며, 텃밭 정원지기는 아기 양육자가 된다. 양육자에겐 씨앗 속에서 미래의 충만한 생명을 알아보는 지혜와 분별력이 요구된다. 다시 헤세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수백 그루의 나무와 수천 종의 꽃, 다시 수백 가지의 과일과 식물로 채워진 가든을 설계한다. 이 가든을 돌보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가든에 심겨진 90%는 그에겐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가장 매혹적인 꽃들이 뽑혀나가고 가장 고귀한 나무들은 잘려나갈 것이며, 뽑혀나가고 잘려나간 꽃과 나무에는 그의 혐오스러운 시선만이 머물 것이다.”
육아에 적용하자니 조금은 섬뜩하다. 육아에 대한 짐이 감당하기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아기의 마음과 정신 밭에 뿌려진 씨앗의 존재가 보이지 않고, 그 씨앗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열매 맺을지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일이 쉽지도 않다. 다만, 우리네 아기에게 심어진 ‘매혹적인’ 꽃과 ‘고귀한’ 나무의 싹이 피어보기도 전에 어른들의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뽑혀나가거나 잘려나가고, 시들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그 씨앗들이 어떻게 길러지고 가꿔지느냐에 따라 꽃과 나무, 식물의 모습과 향과 맛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다.
위안이 되는 부분은 이것이다. 텃밭 정원을 일군 경험에 의하면, 꽃과 식물은 제때 씨앗을 심고, 제때 물을 주고, 아침저녁으로 텃밭 정원에 나가 쓰다듬으며 말을 걸어주고 관심 있게 살펴주면 충만한 생명력을 발산하여 풍성하고 향기롭게 성장한다. 여기에는 특별한 지식이나 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미래의 풍성한 텃밭의 모습은 땅속의 충만한 생명력을 품은 ‘꿈꾸고 있는 씨앗’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한다.
아기 돌봄에서 무엇이 더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