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와 금요일 저녁에 헤어져 그 다음주 수요일 점심쯤에 다시 보는 재회의 순간은 늘 설렌다. 로아를 보고 싶은 마음이 크거니와, 로아가 나를 어떻게 맞아줄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로아는 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해주듯, 거의 매번 나를 보자마자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로 반겨준다.
로아네 온 식구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가염되는 바람에 나의 로아 육아도 한 주 쉬었다. 로아를 2주, 아니 정확히는 10일 만에 보면서도 똑같은 기대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를 본 로아의 반응은? 나의 기대 밖이었다. 나를 본 순간부터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다만, 이번에는 미소대신 ‘이 할아버지는 누구시지?’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평소 로아에게 건네던 나의 상기된 말투와 제스처 세례에도 불구하고 로아의 표정은 그대로다.
일단 내 방으로 물러난다. 옷을 갈아입고, 뜸을 들인다. 거실로 나가 로아를 인계받는다. 품에 안아 얼굴을 받쳐 들고, 눈높이를 맞춘다. 로아에게 익숙한 톤과 표현으로 계속 말을 건네며 할아버지임을 알린다. 이러길 10여 분, 로아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아하, 우리 할아버지!’하고 알아보는 듯, 평소의 미소를 짓기 시작하고 품에 폭 안긴다. 온순한 것 같은데, 보통 깐깐한 게 아니다.
‘핏줄이어서 당긴다.’
로아에 대한 나의 기대에는 은연중 혈연이라는 부분이 전제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로아 임신 소식부터 탄생, 이어지는 로아 육아까지, 내 마음에 꽉 채워져 온 이 벅찬 감정이 ‘나’의 손주이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다른 아기들을 볼 때, 예쁘고 귀엽기는 하지만, 이런 벅찬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 나로서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은연중 기대처럼, 로아도 할아버지에게서 핏줄의 당김을 느낄까? 그럴성 싶지 않다. 로아가 어느 정도 성장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소의 로아가, 그리고 이번처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할아버지를 보고 미소 짓고 반겨주고,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에 편안하게 느끼는 것은 혈연이어서 라기 보다는 그동안 함께 쌓아온 시간과 애정, 신뢰 때문이리라. 로아 생후 3개월이 되기 전부터 일주일에 3일씩 로아와 시간을 함께해오면서, 생리적 욕구에서 시작하여 안전의 욕구를 거쳐 애정·소속 욕구까지, 로아의 바람을 이 할아버지가 일정 부분 들어주었기 때문으로 본다.
‘손주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SBS 스페셜 <격대 육아법의 비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점이다. 손주로부터 ‘핏줄이라 당긴다’는 기대는 접으라는 메시지다. 평소 손주와 왕래가 잦지 않는 경우에도, 자식들이 아기 손주를 데리고 찾아오면, 손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크게 낯가림을 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다. 이를 보고, 특히 할아버지는 ‘핏줄’ 덕분으로 생각하게 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상황에서 아기가 낯가림 하지 않는 이유는 엄마나 아빠가 그 자리에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침 낯가림 시작 징조를 보이는 로아를 데리고 뜻하지 않게 ‘실험’ 해 볼 기회가 생겼다. 아직은 장거리 이동이 힘든 로아를 위해 이번 추석명절을 아들 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아내가 금요일 첫차를 타고 왔다. 이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할머니 품에 안긴 로아의 반응은?
아차, 울음이었다. 현아와 수현, 내가 같은 거실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험’은 계속되었다. 곧이어 로아와 아내만 거실에 남겨지게 되었고, 아내는 원대로 로아에게 우유를 먹이게 되었다. 아차차, 이번에는 더 큰 울음소리가 나더니 그치질 않았다. 결국, 현아가 나타나서야 로아의 울음은 그쳤다.
아내는 지금까지 한 달에 최소한 두세 번은 로아를 직접 만나왔고, 일주일에 세 차례 정도는 로아와 영상으로 만나왔다. 영상으로 만날 때마다 특유의 함박 미소를 할머니에게 아낌없이 선사해왔던 로아였기에 아내는 당황했을 것이다. 내가 아내한테 미리 ‘경고’해 두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로아는 더 이상 할머니를 낯설어하지 않았고, 할머니 품에서 마음껏 ‘이쁜 손녀’가 되었다.
로아가 특별히 성격이 까다롭다거나 모르는 사람을 유별나게 경계하는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 품에서는 오히려 모르는 사람에게도 한참씩 눈길을 주며 미소를 ‘남발’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두 주 만에 본 할아버지에 대한 반응이나, 이번 할머니에 대한 첫 반응을 보면 ‘손주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는 명제는 가볍지가 않다. 로아가 작정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길들일’ 의도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서양에 비해 전통적인 가족 개념이 강한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의 경우, ‘핏줄이어서 당긴다’란 생각은 중시돼 왔다. 지금은 이 생각이 과거보다는 약해졌고, 키운 과정과 아이에게 쏟아부은 정성과 애정 역시 중시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 저변에 적지 않게 깔렸음이 확인된다. 갓난아기 때 자식이 바뀐 줄 모르고 키웠다가 몇 년이 흐른 뒤 밝혀지는 상황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제로 종종 다뤄지는 것이 그 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다. 히로카즈 감독은 2022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송강호가 주연을 맡은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전혀 다른 두 가정의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의 아이들이 신생아 때 태어난 병원에서 뒤바뀐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작된다. 혈육보다는 아이를 키운 세월과 정성, 태도가 쌓여야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 이 영화는 무늬만 일본 영화이지, 한국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상황과 정서, 생각, 주제를 담고 있다.
‘왜, 그걸 몰랐을까?’
자신을 닮은 아들과 아름다운 아내, 일류회사에서 잘 나가는, 소위 사회적으로도 성공가도를 달리는 료타가 병원으로부터 자신이 키우고 있는 아들이 친자식이 아니란 통보를 받고 내뱉은 첫마디다. 료타는 자신이 엘리트로 커온 과정을 아들도 똑같이 밟게 하려고 철저한 양육 방침과 지침, 규율대로 키웠고, 료타의 아들도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순종적으로 따르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료타는 언제나 자신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해 온 아들에 대해 속으로 실망감을 품고 있었다. 아들은 ‘왜 나처럼 하지 못할까’의 의문이 병원으로부터 받은 통보로 인해 그에게는 일순간 자명해진 것이다. ‘혹시 내 핏줄이 아니어서?’란 의문을 왜 한번도 자신이 가져보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이다. 자신의 피만 타고났더라면 식의 이기적 자존감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사회적 신분이나 자녀 양육에서 두 가장의 정반대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뒤바뀐 아이들의 모습에서 ‘타고남’보다는 ‘길러짐’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에서 료타는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주지도 못하면서 자기 생각만을 강요해왔던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잘못되었음을 서서히 깨달아간다. 동시에 혈육의 친자식과 그동안 키워온 아이 둘 다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키워온 아이와 친자 중 한 아이를 선택해야 하는 출구 없는 상황을 두 아이가 두 집 사이에 번갈아 ‘교환,’ ‘왕래’하는 다소 애매한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오픈 엔딩은 고의적인 것으로, 해석은 결국 시청자의 몫이 되었다.
한국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를 히로카즈 감독은 혈육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자문이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내와는 달리 자신은 아빠가 되었다는 실감이 안 들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불안과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의문은 눈앞의 아이가 내 핏줄이 아니라면 예전과 똑같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의문을 증폭시켜 보자는 취지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누구도 선뜻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아버지란 일도 다른 사람은 못하는 거죠."
료타의 고백처럼, 아이를 키우는 ‘일’은 혈연에 기대어 자동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엄마는 엄마로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조부모로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함께하는 시간과 노력이 켜켜이 쌓임으로써 키움이란 ‘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왜, 이걸 몰랐을까?'
오늘도 나는 이 명제를 마음에 담고 로아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