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는 중요하지 않다’

by 로아 할아버지

‘주말에 수현이와 저와만 있을 때는 로아 우유 먹는 양이 줄어들어요.’


‘로아가 이렇게 활발하게 잘하는 옹알이를 수현이와 저는 왜 못 들었을까요?’


‘로아가 저희와 있을 때는 투정 부리다가도 할머니나 할아버지 품에 안기면 그쳐요.’



지난주 내게 건넨 현아의 토로에는 엄마 아빠로서 로아를 제대로 양육하고 있는지 하는 자책의 뉘앙스가 읽힌다. 로아 외할머니나 내게 양육에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아 수현이의 양육 방법과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엄마 아빠로서 로아 양육에 관한 관심은 외할머니나 나보다 더 크고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며, 아이에 대해 더 많은 고민과 계획을 세운다.


차이가 있다면, 현업과 가족의 미래 설계에 매달리는 거의 모든 엄마 아빠처럼 현아 수현이는 육아 이외에도 집중해야 할 일이 많고 그래서 항상 몸과 마음이 바쁘다. 이와는 달리, 조부모는 아기와 보내는 시간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어서 아기의 타임과 리듬에 관심을 두고 따라가 줄 수 있다.


현아의 자책성 토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많은 엄마 아빠가 아기에게 갖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내와 나도 그랬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아내는 자책도 많이 했다. 아이들이 무난하게 성장하고 각자의 삶에서 나름대로 행복이란 단어를 가깝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에도 아내는 때때로 그 당시를 회고하며 여전히 안쓰러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IMG_2052.JPG


미국의 젊은 엄마 아빠들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바쁜 일과 활동으로 인해 어린아이에게 충분한 관심을 주지 못한다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심정은 문화를 불문하고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자책감을 가진 부모에게 ‘위로’가 되는 책이 최근에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하버드대 인류학 교수 부부가 쓴 <부모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아이들의 성격 형성과 성장하여 삶을 이끌어나가는데 부모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은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적으며,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과 정성을 많이 기울이든, 적게 기울이든 아이가 성장하여 삶을 영위해나가는데 의미 있는 차이를 가져오지 못한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에게 정성과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


위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과 인도, 아프리카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많은 사례를 싣고 있는 이 책은 바쁜 삶을 영위하느라고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충분히 돌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심한 자책감을 느끼는 미국의 젊은 부모들에게 향해 있으며 이러한 메시지는 그들에게 언뜻 위안이 되는 듯 보인다.


원제목 <부모는 중요한가? (Do Parents Matter?)>에 잘 드러나 있듯이, 이 책은 아이 양육에 ‘부모는 중요하다’는 기존의 주도적인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만큼 부모의 양육 태도와 방법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녀 양육에 자책감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는 부모에게 부담감을 덜어줄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 하기 나름이라는 육아 이론이 여전히 대세인 점에서 이 책이 주는 위안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부모로서의 자식의 양육과 교육에의 대한 관심, 책임감과 자책감이 미국인들보다 절대로 적지 않은 한국의 부모로서는 더더욱 수용하기 힘들 수 있다. 한글 번역서 제목이 원제목보다 직설적이며 도발적인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저자가 이 책의 기본 전제로 삼고 있는 아이들 특성에 대해서는 한국의 부모들이 더욱더 주목하고 귀담아들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우리 젊은 엄마 아빠들은 어린 자녀에 대한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똑하고(smarter), 쉽게 무너지지도 않고 어려움에 빠져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회복력이 있으며(resilient),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independent)이 있다.’

IMG_4512.JPG


그렇다면, 불안감에 자식의 일에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고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보다 조금은 객관적이고 무심한 듯한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부모가 가져야 할 태도는 아이 스스로의 생각과 회복력, 자기 주도 능력을 키워주고 믿어주고 존중해주는 일이지 싶다. <미국의 부모들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라>라는 위 책의 부제는 <한국의 부모들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라>로 들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은 아닌 듯싶다.



어른이 아니라 아이가 중심이 되고 기준점이 되도록 아이를 존중해주며 키우는 일은 아기의 수유 방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기의 신체 리듬과 인지기능 발달에 따른 아기의 관심을 어른이 세심하게 관찰하고 배려하며 이에 맞춰 수유하는 일이 아이 중심의 양육태도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대개는 전문가들에 의해 과학적으로 정해진) 틀에는 아기들의 생리와 정서 리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로아 수유 경험에서 느끼게 된다.


로아는 저체중으로 태어났다. 로아의 수유 양은 언제나 아기 성장주기에 따른 권장량에 미치지 못하고, 로아의 육아 지표에서 수유 양은 가장 중요한 관심 사항이 되었다. 식탁 위에 놓인 매일매일의 수유 일지에 적힌 하루 총량에 따라 현아와 수현의 표정이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는 이유다.


로아 육아를 시작하면서 현아 수현이는 수유 대목을 강조했지만 내게는 수유 역시 낯설었다. 첫 주는 그동안 로아 육아를 전담해주신 육아도우미 분의 실습을 겸한 교육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수유해서 키운 아들도 할아버지가 된 아빠가 못 미더운지 틈나는 대로 수유 노하우를 전수해 준다. 나 스스로도 수유에 관한 육아서적과 온라인 영상을 기회 닿는 대로 참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문가들조차도 수유 방식을 두고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먹여야 한다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아이가 배고픔의 신호를 보내면 그때 먹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IMG_2301.JPG


처음에는 정해진 시간 주기로 먹였다. 아기의 기분이나 욕망을 들어주려는 ‘동물적 충동’을 무시하고 아기와의 ‘교양인다운’ 거리를 유지하며 규칙적인 계획에 따라 수유하라는 이 서구식 ‘행동주의’를 따랐지만, 로아의 수유 양은 잘 늘지 않았다. 이번에는 현아가 링크를 걸어준 대한모유수유의사회에서 권장하는 방법인 배고프기를 기다렸다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수유를 했다. 그런데, 로아의 배고픈 신호를 제때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거니와, 다행히도 짐작이 맞아떨어진 경우도 졸린 상태와 자주 겹치다 보니 우유병을 빨다 중간에 잠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육아 3주차가 되니 로아가 내 몸에 착 감기고 내 품에서 우유 먹는 로아도 한결 편안해 보인다. 아빠로서 아기를 키우던 30년 전의 경험을 소환하는 데는 몸 풀기가 필요했던 듯하다. 수유가 몸에 익숙해지면서, 이제는 로아의 수유 양을 늘려 볼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다. 정해진 시간이냐 아니면 배고플 때 수유해야 하느냐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닌, 로아의 신체 리듬에 따른 수유 리듬을 맞춰보기로 한 것이다.


언제나 기준치에 미달하는 체중과 수유 양으로 조급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아는 수유 양을 주 단위로 조금씩 늘렸지만, 로아에겐 늘어난 양이 벅차게 보였다. 이 모습을 보면서 모든 아기는 각기 다른 신체 리듬을 갖고 있을 테니, 로아의 신체 리듬에 맞춰 먹도록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로아의 낮 동안의 활동과 수면 리듬의 패턴, 깨어 활동하는 시간과 잠드는 시간에 먹는 양을 파악하여 이에 맞추어 수유해 보았다. 할아버지의 이 ‘비전문가적’ 방법이 효과가 있었다.


근래 20주에 접어들면서 소위 ‘도약기’ 특징으로 수유량이 줄어들고 있던 로아를 보면서, 특히나 ‘도약기’의 아기들에게는 수유 과정에서 또 다른 리듬 배려가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육아 전문가들에 따르면, 모든 아기는 성장단계에서 여러 차례의 ‘도약기’를 거치게 되며, 수유 양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도 이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의 하나로 엄마들을 불안하게 한다고 한다. 로아 연령에 해당하는 도약기는 약 5주 정도 진행한다고 알려져 있으니, 현아로서는 더욱 초조한 일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로아의 경우 수유량이 줄어든 것보다는 ‘도약기’에 급격하게 진행되는 인지기능과 신체 발달로 인해 관심이 분산되면서 수유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로아는 수유를 하면서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스토리에 보다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젖병 빠는 속도를 늦추면서 할아버지의 눈을 빤히 쳐다보거나, 얼굴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를 즐겨한다. 아니면, 젖병 빨기를 중단하고 옹알이로 ‘대답’ 하기도 하고, 스토리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톤에 따라 웃거나 무서워 한숨 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주변에서 작은 소리라도 나면, 고개를 획 돌려 확인하느라 먹는 일이 중단되는 것은 다반사다. 최근에 잇몸 위로 돋아 나오는 이빨 때문에 가려워 빠는 것을 중단하고 젖병 꼭지를 깨무는 일은 매번 반복된다.


주변 사물이나 환경, 사람에 대한 인지 기능이 발달하면서 로아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자주 빼앗기다 보니 돌보는 입장에서는 로아가 먹는 일에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지기능이 첨가되었을 뿐 로아의 먹는 양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다만, 인지기능과 신체 발달에 따른 집중력 분산을 고려하여 수유 시간을 여유 있게 늘리고 기다리는 태도의 수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IMG_4244.JPG


도약기의 정점에 있는 로아,

오늘도 나는 소파에 누워 왕잠투정을 부리는 로아를 배 위에 올려두고 마음껏 투정을 부리도록 해준다. 어른도 쉽게 잠이 들지 않을 때는 민감해지고 짜증이 나는데, 그 시간이 어른보다 두 배나 되는 아기가 투정 부리는 것은 당연하다. 외부적 요인만 신경 써줄 뿐 나로서도 별달리 해줄 일이 없다. 간간히 등을 두드리며 짜증에 맞장구 쳐주고 소파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만 해줄 뿐이다. 달래지 않아도 결국에는 스스로 잦아든다. 이 역시 로아가 ‘도약’하고 있다는 표시이니 나로서는 격려해주고 존중해주면 그만이다.


잠투정이 잦아들 무렵, 우유병을 물려주면 또 다른 장거리 장애물 경주가 시작된다. 이 역시 배려해주고 격려해주고 즐기다 보면 스스로 수유 리듬에 맞춰 피니시라인을 통과한 대견한 로아의 모습을 보게 된다.


keyword